BASEBALLPARK

- 베팍에 올리는 첫 글인데 앞으로 이따금 영화 혹은 음악 혹은 스포츠 혹은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졸필이지만 그냥 재밌게 봐주세요.^^

1.

<카를로스>의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폰 트리에 최고작이라고 했던 <멜랑콜리아>는 악평이 자자해서 보지 않은 그의 코미디 영화들을 제외하면 저에게도 가장 좋아하는 폰 트리에 영화가 될 듯 싶습니다.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시피 전작 <안티크라이스트>와 많은 접점과 대조를 이루고 있어 비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2.

<안티크라이스트>가 상징에 대해 병적으로 파고들어 대단한 세공력을 보여주는 것에 비하면 <멜랑콜리아>는 언뜻 그냥 자유롭게 축조된 작품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트리에가 몰두했던 '안티크리스트'의 책 같은 것이 없이 2부는 즉흥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하니 더욱 그래보이지요. 하지만 통시적인 기독교적 상징을 비튼 <안티크라이스트>의 방대하고 거시적인 것과는 대조되는 한 마을과 사람들을 다룬 <멜랑콜리아>의 지극히 미시적이고 공시적인 세계가 오히려 더 풍부하다고 보여집니다. <안티크라이스트>에 담긴 트리에의 시선이 단선적이고 투박한 감이 없지 않았던 반면, <멜랑콜리아>는 영화에 대한 자의적인 통제를 없애고 자신의 모든 걸 놓아버린채 더없이 자유롭게 창조해낸, 파편적인 우아함으로 가득찬 작품처럼 느껴졌습니다.


3.

<안티크라이스트>와 같이 슬로우모션으로 오프닝 시퀀스에 압도적인 광경을 담아내는데, 이 8분 가량의 시퀀스는 영화(특히 1부)의 거의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저스틴(커스틴 던스트)가 눈을 뜨면서 시작되는 첫 쇼트를 상기할 필요가 있지요. <안티크라이스트>에서 추락과 아이의 탄생이 죽음과 소멸을 상징한다면, <멜랑콜리아>에서 저스틴의 존재는 종말을 불러일으키는 암적인 존재처럼 각인됩니다. 그녀가 눈을 뜨자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이 잿더미가 되며, 그 자신도 상실감으로 누워 추락합니다 (존 에버릿 밀레의 <오필리아>).  저스틴이 하는 말이 곧 트리에가 품고 있던 생각이라는 것으로 치환시켜본다면 트리에는 그 자신 역시 병자이며 암적이다라고 선언하는 셈입니다. 물론 이것은 트리에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지금 실 세계에서 죄악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자신의 정신적 '무의식'과 그 무의식에 의해 만들어진 저스틴이라는 존재가 해악이라는 것이지요. 

피터 브뤼겔 <눈 속의 사냥꾼>

4.

저에게 <멜랑콜리아>는 환자 트리에의 무의식이 조종하고 보여주는 종말의 세계처럼 보입니다. <안티크라이스트>에서 빼곡한 상징 체계를 세워 매우 이성적으로 통제시킨 폰 트리에의 강한 인장이 느껴지는 반면, <멜랑콜리아>는 우울증을 겪는 트리에와 저스틴의 심리를 통제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다가오니까요. 이 영화 쇼트들에서부터 특히 그렇게 느껴집니다. 이 작품에는 유기적으로 연결된 쇼트들과 씬들이 없습니다. 이 영화가 논리적인 스토리텔링의 구조를 띌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무의식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고 파편화되어있기 때문이며 무의식 속에서 인간(저스틴과 트리에)은 본인이 믿고 갈망하는 것에 무의식적으로 다가가길 원하기 때문이지요. 1부에서 클레어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이야기는 대사마저 축약시킬 정도로 씬들이 점프됩니다. 클레어는 성대한 결혼식에 완곡한 거부감을 느끼니까요.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저스틴이 자신이 있기 고통스러워하는 파티장 (1부), 답답한 집 내부 (2부)를 벗어나서 아늑하게 비치는 행성 멜랑콜리아를 바라보는 모습을 모든 걸 놓고 싶어하는 저스틴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여줍니다. 이것은 폰 트리에의 잠재의식이 담긴 꿈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꿈은 다른 이들에겐 재앙인 존재지만, 재앙이 닥칠 때 보통 사람들보다 더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트리에 본인이 직접했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저스틴에겐, 폰 트리에에겐 더 없이 편한 공간입니다. 그래서 (<오필리아>를 차용한) 드레스를 입고 누운 저스틴과 상반되는 나체 상태로 행성을 바라보는 저스틴의 모습은 지극히 상반됩니다.

존 에버릿 밀레의 <오필리아>

         
상반된 저스틴

5. 

화면 색채가 금빛 톤인 정신없던 1부에 비해 차가운 청백색으로 그려진 2부에서 사실 가장 이성적인 사람은 환자 저스틴입니다. 1부에서 저스틴에게 클레어가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라고 말하자 저스틴은 '좋아'라고 대답하지만 2부에서 저스틴은 매우 냉소적입니다. 이것은 곧 트리에가 보내는 서늘한 비웃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앙이 닥칠 때 보통 사람들보다 더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트리에 본인의 말을 다시 생각해볼 때, 매직동굴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클레어의 모습과 대조되는 평온한 저스틴의 표정은 종말을 앞두고도 이를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클레어와 세상에 보내는 트리에의 진언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6.

더 복층적이고 불안한 캐릭터를 연기해야했던 커스틴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트리에의 페르소나가 되어버린 (또 하나의 충격적인 내용을 담은 차기작 <님포매니악>에도 이미 출연이 확정되어있는) 갱스부르가 역시 트리에 영화의 톤과 더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드네요.

7.

최근 영화 속 클래식 삽입곡들의 활용도의 차이도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에 삽입된 베토벤의 협주곡 '황제'의 2악장이 소년을 위로해주기 위해 사용되었다면, <멜랑콜리아>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 서곡은 이 오페라 곡이 담고 있는 비극적 멜로드라마 이야기를 시종일관 불안한 영화의 분위기와 인물들의 내면심리를 그려내는 것으로 사용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