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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이미 19세기부터 최고의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20세기의 독일의 첨단기술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라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과 다르게 자연과학과 공학은 별개입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했다고 해서, 기술이 따라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물론 넓은 자연과학의 저변이 기술 발전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게 지금까지의 과학사 연구결과입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하면, 기술이 발전한다는 이론도 사실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입니다. 맑스주의적 기술결정론자나 맨하튼 프로젝트를 관리했던 버니바 부시가 2차세계대전 이후 <과학, 그 무한한 프런티어>에서 주장한 선형 발전론도 이런 이데올로기 중 하나지요. 우리나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기술을 육성할 필요가 있었기에 이러한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였고, 국내 자연과학자들도 연구비를 따내기 위한 편리한 틀이었기에 자주 사용하고 하지요.

다시 독일로 돌아오면,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과학과 기술을 강하게 연결한 것이 19세기 독일입니다. 앞서 말한 기술결정론이나 선형발전론의 경험적 근거가 된 곳이 바로 독일이지요. 미국 듀폰사의 나일론 사례도 있지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독일입니다.

19세기 이전, 과학과 기술은 사실상 무관했습니다. 제임스 왓트의 증기기관은 '블랙'이라는 과학자의 잠열 원리를 이용해 개발됐다고는 하지만, 왓트는 원리도 모른채 증기기관을 개발했습니다. 만들고 나서 잠열의 원리라는 것을 터득했을 정도지요. 산업혁명 이전의 기술혁신은 과학적 이론에 근거했다기 보다는 경험적 시행착오로 얻어진 것입니다.

그러다 독일에서 과학과 기술이 연결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서는 비료나 염료를 합성하는 화학공업이 이미 발전돼 있었습니다. 이 화학공업이 유기화학의 원리를 끌어와 큰 발전을 이루게 됐습니다.

이 당시 독일은 통일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니와, 당시 독일 정부가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알지는 않았습니다. 과학기술을 이용해 발전을 했던 앞선 경험이 없는데, 어찌 정부에서 돈을 지원하겠습니까. 이때의 발전을 두고 공학자의 '기업가정신'때문이라는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연구비따기는 하늘에서 별따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산업혁명 이전의 과학자들은 주로 신부거나, 영주, 이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이 많았죠. 정부나 기업의 후원을 받아 연구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대학에서는 더 많은 연구를 하기 위해 더 많은 재원이 필요했고, 그 재원을 줄 만한 곳은 화학기업이었습니다. 독일 대학의 과학기술자들은 과학과 기술을 연계해 자신들의 효용을 증명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산업적으로 발달돼 있었던 유기화학분야였습니다. 덩달아 이때부터 과학기술에서의 특허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발견이나 발명이 보호되지 않은다면, 기업들이 연구비를 제대로 주지 않기 때문이죠. 또 기업입장에서도 확보한 기술이 보호되지 않는다면 연구비를 줄 이유가 없었을테니까요.

국가적 동원 아래 기술 연구를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1차세계대전부터 입니다. 전쟁의 필요에 따라 국방 기술이 발전되기 시작했고, 이와 연관된 화학, 재료, 역학 등이 먼저 선행했고, 후에 전자, 통신 등이 따라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민간 부분이 아닌 국방 기술에 국한된 측면이 있습니다. 독일을 비롯한 서구의 민간 과학 기술의 발전은 적어도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대학과 기업 주도였습니다.

정리하자면 20세기 독일의 과학기술 발달의 초석은 정부주도의 과학기술 연구 정책이 아니었고, 19세기 독일 화학공업의 발달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것이며, 국가 주도의 과학기술 연구는 1차 세계대전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국방이 아닌 정부의 민간 자연 과학 연구부분에서의 투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버니바 부시 이후에 시작됐을 정도로 역사가 짧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