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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친하게 지내는 영화과 교수님이랑 만나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 중에 <후궁>을 봤냐고 묻길래 아직 안봤다고 했다.
자신은 <후궁>을 보고 난 뒤 처음엔 못만든 영화로 평가했다가 가만 생각하니 너무 야박한 평가인 것 같다고 했다. 왜 생각이 바뀌었냐고 묻자 조명이나 의상 등에 공을 들인 점은 칭찬할만하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의 영화에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려다보니 중심을 잃은 것이 아쉽다고 했다. 영화를 안 본 내가 뭔 말을 하겠는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어제 저녁에 <후궁>을 봤다. 내 머리 속에는 몇일 전 본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가 생각이 나서 일이 손에 안 잡히기에 다른 영화로 이 생각을 잠시 눌러두고 싶었다. 마침 그 교수님의 말도 있고, 지갑에는 공짜 티켓이 한웅큼이나 있길래 <후궁>을 보러 간 것이다.

<후궁>은 그냥 못 만든 영화다. 못 만든 영화는 초반 10분에 승부가 난다. 이건 아까운 청춘을 영화관에서 낭비하면서 배운 내 경험이다. <후궁>에서 초반  사냥 장면은 불필요한 장면인데, 그마저 참 못 찍었다. 사냥의 흥분이나 박진감이 전혀 살지가 않는다. 초반의 우려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왜 그 씬이 필요한지, 왜 그 장면에서 굳이 숏을 나눠야 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 불필요한 씬과 숏이 남발되다보니 영화는 정서적인 힘이 없다. 감독은 영화 마지막에 반전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플롯을 더 촘촘히 짜야했다.

김대승 감독은 임권택 감독의 조연출 출신으로 <번지점프를 하다>로 장편 데뷔를 한 인물이다. 데뷔작 이후 그의 영화는 점점 나빠지고 있다. <후궁>을 보고 나면 '이 감독 번지점프 하다가 다쳤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후궁>에서 그가 신경을 쓰야 했던 장면들은 정사씬 보다 궁중의 암투를 숨막히게 그려내는데 있다. 그 숨막힘은 화려한 장식으로 나타낼게 아니라 닫힌 구조를 이용한 촬영이나 미장센에 있다.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와 <씨받이>를 보면 우리 건축을 이용해서 숨막힐 것 같은 갑갑함을 기가 막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가 배워야 할 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웰메이드 영화가 가지는 문제점은 뭔가 시각적으로 자꾸 화려한 것을 보여줘야한다는 강박증을 유발시키는데 있다. 감독은 이왕 확보된 자본을 가지고 매 씬 매 숏마다 관객의 눈을 홀리려고 화려한 치장을 한다. 그런데 주의해햐 할 점은 그건 관객을 속이면서도 자기 자신도 속고 있다는데 있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겹겹이로 된 미닫이 문이 <스타워즈>의 우주선 문처럼 자동으로 열린다. 화면 전경에서부터 후경까지 화려하게 배치된 문들의 요란함 속에 궁중 생활의 비애와 억눌림이 표현될 수 있을까? 애초에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화려한 치장 속에 잊어버린게 아닐까?

값비싼 음식 재료들이 옆에 쌓여 있으니 버리지는 못하고 그걸 냄비에 다 넣다보니 정작 만들어진 음식은 정체 불명의 것이 되어 버린 꼴. 그런데 그 음식 재료가 값비싸니 그 음식을 부분적으로나마 칭찬해야 할까? 난 반대다.

p.s) <원초적 본능>을 연상케하는 마지막 장면이 굳이 그 지점에서' 필요했던 이유가 뭘까? 없다. 굳이 말한다면 영화관 나가는 관객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조여정의 몸매를 던져주는 정도. 게다가 이 영화는 조여정을 벗기는데 야하지도 않다. 조여정을 데려와 벗겨놓고 그 정도 밖에 못 만드는 것은 이대호를 데려와 대주자로 뛰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