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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Fantasy-1>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0월 마지막주 가을날 오후.  처다보고 있는 엑셀 화면에서 눈을 떼고 창밖의 우중충한 빗줄기를 바라보며, 약간의 우울함을 나직하게 즐기고 있는 시간.  멜치는 뜨거운 커피가 한잔 마시고 싶었다.

직장생활 4년차. 일 돌아가는 것은 이제 손바닥 손금이고 후배 직원도 두명이나 생겼다.  일이 익숙해지다보니 별로 재미도 없고, 이렇게 직장의 톱니같은 역할로 아직 젊은 청춘을 보내야 할 것인지,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멜치는 고민이 들기 시작되었다.

연주와의 신혼생활도 1년여를 넘어가니 처음의 신기하던 하루하루가 이제는 일상으로 변해가고 뭔가 터닝포인트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이 지루하고 권태로운 시점......

“자자....  직원여러분, 신입직원이 오셨습니다.  인사들 하세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멜치는 과장의 ‘신입사원’, ‘인사’ 이런 말에 고개를 과 사무실 입구쪽으로 돌렸다. 

비오는 날이였지만, 실내보다는 창쪽이 더 밝았었는지 동공이 아직 열리지 않아 멜치는 신입사원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일 뿐이였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신규입사한 서지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꾸벅하고 고개를 드는 신입사원을 보면서 멜치는 그녀의 인상이 진주만이란 영화에서 나온 여배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이쿠. 우리과에도 저런 미인이...’

멜치는 괜시리 권태롭던 오후가 밝아지는 느낌이였다.  13명의 직원중 여직원은 결혼 6년차 깐깐한 홍대리밖에 없었는데 상콤한 느낌의 신입사원이라.   게다가 서구적인 저 이목구비...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진주만에 나오는 그 여배우 이름은 ‘케이트베켄세일’ 이였다.

서지우씨가 멜치에게도 와서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지우입니다.”

“아..예 반갑습니다.  멜치라고 합니다.”

그녀의 손가락은 길쭉하였고 손톱이 깨끗하게 다듬어져 연한 핑크빛의 메니큐어가 발라져있었으며 긴장감 때문인지 약간의 땀이 손바닥에 배어나와 멜치에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서지우씨는 재무과 용도계의 계원이 되어 사내 자재 구입관련 예산 업무를 보게되었다.  멜치가 담당 하는 업무와 연관은 있었지만, 다른 계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업무적으로 그녀와 상대해야 할 일은 없었다.

서지우씨가 발령을 받자 사내 총각 여러명이 그녀 주변을 어슬렁 거렸으나, 서지우씨는 전혀 틈을 주지 않는 것 같았다.    멜치는 그녀에게 사무실 동료라는 지위 이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공식적인 관계만 유지하였다.  매력적인 여성이였지만, 이미 작년에 결혼을 하였고 그는 아내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두어달이 지났을 무렵 총무과 강차장이 찾아와 용도계와 업무적으로 마찰이 있었고, 용도계 직원들이 모두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과정에 업무 담당자였던 서지우씨가 강차장에게 엄청 깨지는 일이 발생했다.

멜치는 강차장의 악다구니가 좀 짜증이나서 “강차장님 거 남의 사무실 와서 너무 소리지르는 것 아닌가요” 하며 끼어 들었다가 둘이서 큰 말싸움이 발생했다. 

“멜치 너 이자식.  너 조심해. 나이도 어린 것이 어디 위계질서도 없이 덤비고....”

“강차장님 그러지 마셔요.  이야기 들어보니 우리과가 잘못한 것 하나도 없는데, 지위 높다고 신입직원에게 그쪽과에서 잘못한거 떠 넘기기 할려고 하지 마십쇼.  추해보입니다.”

주변 사람이 말리지 않았으면 주먹 다툼이 오갈 상황이였다. 

몇시간 후 서지우씨가 커피를 하나 뽑아와서 멜치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멜치님.  아까 고마웠어요.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지 몰랐는데 도와주셔서 봉변을 모면했네요.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지우씨가 잘못한것도 아니던데...”

집에 귀가를 하니 연주가 오늘 싸움이 있었던 사실을 들었는지 멜치에게 말을 건낸다.

“자기 오늘 사무실에서 총무과 강차장하고 싸웠다매?”

“응.  쫌  뭐...”

“그런데 소문 이상하게 났더라.....?”

“뭐...  뭐라고...”

“자기가 백기사처럼 예쁜 여자 직원을 구해줬다고 하던데...  올해 신입사원중 제일 미인이라는 소문이 있어...  나보다 이뻐?”

“아이...거 무슨 소리야 같은 사무실 직원이 일방적으로 당하니까 좀 도와준거지...”

“그정도가 아니였다는데...엄청 핏대 올리면서 자기여자 보호 하듯 했다는데...?”

“누가 그런 헛소리를...   됐거등....  자자......”

멜치는 연주는 뭐라고 한마디 더 물어 볼려고 하는데, 씰데없는 소리...라고 하며 묵살하고는 침실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썼다.   아내가 슬슬 바가지 긁을라 치면 자는척 하는게 최고라는 것은 모든 남편들이 알아야할 스킬일 것이다.

포근한 이불속에 들어오니 나근해지면서 멜치는 금새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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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치님...  저기....”

퇴근 시간도 한창 지나 내일까지 보고 하여야 하는 내년 사업별 예산서를 만들기 위하여 컴퓨터에 코를 처박고 계수를 조정하고 있는 멜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업무 집중을 방해하는 목소리에 약간 짜증이난 멜치는 미간을 찌쁘리고 뒤 돌아보니 서지우씨가 베시시 웃으며 멜치가 좋아하는 카페라떼 커피를 들고 있다.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아릿따운 처자가 커피를 드리미는데, 인상을 쓸 남자가 어디있겠는가.  

멜치는 빙긋 웃음을 띄고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아니 아직까지 퇴근도 안하시고....  사무실에 나 혼자 있는줄 알았는데.....”

“저녁 먹고 잠시 들어왔어요...   많이 바쁘신가본데 제가 뭐 도와드릴 것 없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이일은 누구에게 부탁하거나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어떻하든 마무리를 해야하니깐요..”

“예.....”

잠시 둘 사이의 대화가 중단되며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멜치는 뭐라고 대화를 이끌어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는데 서지우가 먼저 말을 꺼낸다.

“멜치님.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예. 말씀하세요..”

“저 제가 이번에 소형차를 하나 샀는데요.  제가 장롱면허거든요.  그래서 차를 몰고 아직 사무실 출근을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혹시 주말에 다른 약속이 없으시다면 저 운전연습 좀 시켜주실래요?”

멜치는 마시던 카페라테를 뿜을뻔 하다가 간신히 꿀떡 삼켰다.

“제..제가요? ”

“예.  멜치님이요.”  서지우는 멜치의 눈을 똑 바로 처다보며 ‘바로 너말이야“하는 식으로 답했다.

“아....뭐 안될 것은 없지만,  저....   지우씨.  저 결혼했어요...”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더 부담이 없죠.  제가 고향 떠나서 자취하는건 알고 계시잖아요.  사무실 다른 총각들은 왠지 쫌 꺼려지지만, 멜치님은 결혼도 하셨고 또 지난번 저를 도와주신 것 같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멜치는 서지우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절하기 싫었다.   유부남에게 지금 아가씨가 어떻게 보면 데이트를 신청하는 것 아닌가.  더군다나 그녀는 케이트베켄세일을 닮지 않았냐 말이다....

“뭐 그러죠.  대신 강의료는 비쌉니다.  하하하”

서지우와는 그주 일요일 10시에 그녀가 살고있는 인근 공원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멜치는 연주에게는 대학 써클 동문회 체육대회가 있다고 알리바이를 만들어 내었다.

일요일 약속한 시간에 서지우를 만나 멜치가 운전을 하고는 인근 대학 캠퍼스에 갔다.

서지우는 핑크빛이 살짝도는 체육복과 운동화를 신고 LA다저스 야구 모자를 쓰고 나와 사무실과는 전혀 다른 풋풋한 1-2학년 여대생의 분위기를 품어냈다.

일요일이라 비교적 한적한 대학 캠퍼스 경내를 시속 2-30km로 주행하면서 운전연습을 시켰는데, 장롱면허라던 서지우의 운전솜씨는 그런대로 안정되어 있었다.

두시간에 걸친 연습을 마치고 점심을 같이 먹다가, 서지우가 멜치에게 당돌한 제안을 한다.

“오늘은 저를 가르치셨으니까 선생님이시잖아요.  선생님. 제자 실력이 늘었는지 오늘 배운 운전 연습을 테스트 해보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한번 달려보면 어떨까요?”

멜치도 지금 집에 들어가기는 알리바이가 잘 성립되지 않아 그러자고 동의를 했다.

일요일 막하지 않는 고속도로가 어디있겠는가..... 먼저 차가 드문곳까지 운전은 멜치가 하기로하고 영동 고속도로로 차를 올렸다.

용인-이천-여주까지 근 한시간을 달리니 차량의 흐름이 좀 한적해졌다.  멜치는 휴게소에서 서지우에게 핸들을 넘기고는 90킬로를 넘기기 말고 제일 가장자리 도로로 달리라고 했다.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서지우가 날렵하게 운전석에 오르더니 기어를 D에 놓고는 엑셀레이트를 밟는다.  70킬로, 80킬로, 90킬로, 100킬로.......  서지우는 속력을 내리지 않았다.

“지우씨 너무 빠르지 않나요.  고속도로 처음이라며...”

“예...  고속도로 처음이지요.  이번달에는....헤헤헤.....”

“어?  운전 할 줄 알았던 거예요?  아니 그러면서 왜 나에게 운전연습을....”

서지우는 대답대신에 양쪽 창문을 열었다.  늦가을 차가운 바람이 차창으로 확하고 밀려들어오며 차갑지만 상쾌한 공기가 유입된다.

서지우가 바람소리로 가득한 차안에서 큰 소리로 말한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멜치님과 이렇게 드라이브가 하고 싶었어요.  저.  잘못한 건가요? ”

“아니 잘못했다기 보다도 너무 의외여서....난 유부남이고...”

“또 그러시네...   저랑 같이 있는게 불편하세요?  저 매력적이잖아요..”

도발적인 그녀의 발언에 멜치는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러면 또 어쩌랴....  가을이 아름다운데...

서지우가 운전한 차는 영동고속도로 끝까지 달려 남쪽으로 방향을 튼 후 정동진에 도착하였다.

얼마전 종영된 모래시게 덕분에 정동진을 구경온 관중들은 꽤 많았다.

정동진역에서 매표하여 기차역을 구경하고 고현정 나무를 보고, 바닷가로 내려가서 파도소리를 같이 들으며 백사장을 걸으니 마치 서지우가 새로운 연인이였으면 하는 생각을 멜치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주와는 다른 매력을 가진 당돌하기도 하고 도발적이기도 한 여자.  만약 이 여자가 조금 일찍 멜치 앞에 나타났다면 그래도 연주를 선택했을까.   멜치는 백사장을 거닐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사진이 들어가고 하다보니 길어서 한편으로 안들어가 할수없이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