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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런 내 동생 중탁 보아라.
여름 방학 잘 보내고 있냐.
형이 여행중인 이 곳 프랑스는 말도 안 통하고 음식도 안 맞아서 상당히 곤혹스럽지만,
그래도 수중에 돈이 있어서 어떻게든 근근이 살아 있단다. 돈이야 말로 진정한 세계 공용어더라.
여기 사람들이 우리와는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니
그제서야 우리의 모습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고,
익숙한 일상에 젖어서 굳어진 생각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더구나.
평소에 익숙하던 것들과 여행지에서 본 낯선 것들의 차이에서 충격을 먹은 다음,
나를 새롭게 돌아볼 기회를 가지는 시간이랄까. 여행이란 그런 것 같다.









그저께 오르셰미술관에서도 크게 느낀바가 하나 있어서
원래 가려고 마음 먹었던 베르사유를 포기하고 고흐 마을로 잘 알려진
오베르쉬르우와즈로 왔단다.







보통 때는 전화도 잘 하지 않던 형이 생뚱맞게 웬 편지냐고 의아해 할 법도 하다.
그렇지만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는걸 보니 죽을 때가 된게 아닌가 하는 걱정은 안해도 된단다.
여기가 고흐가 마지막으로 살다 간 곳 아니겠냐.
살아 생전 동생인 테오 반 고흐에게 수백통의 편지를 써 보냈던 고흐 흉내를 한번 내 보고 있는 거다.
알다시피 형이 철이 좀 덜 들어서 청소년기의 모방심리가 아직까지 남아있지 않냐.




하지만 그런다고 고흐처럼 될 줄 아느냐는 식의 반박은 안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할말이 많거든.
테오는 가난뱅이 화가인 고흐에게 매달 생활비를 꼬박꼬박 챙겨주고
화방을 운영하면서 그림도 팔아(주려고 노력해)줬었는데,
네가 그렇게 해 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나도 고흐 따라 화가 되겠답시고 네게 돈 달라고 칭얼대지 않을 테니
우리 그냥 평소처럼 무심한 사이로 지내는 편이 좋겠다.
나는 고흐가 아니고 너는 테오가 아니니깐.
다만 나름 정성 들여 쓰는 중이니 성의를 생각해서 이 편지만큼은 끝까지 읽어봐 줬음 싶구나.
어렸을 때 우유값 삥땅쳐서 오락실 갔다고 엄마한테 일러 바친거 용서 해 줄 테니 제발 좀. 응?




















고흐 말마따나, 여기는 아주 아름답고, 오래 된 집들이 많아. 특히 창문들이 인상적이다.
형은 지금 막 가셰 박사의 집에서 나왔단다.
아, 가셰가 누구인가 하는 설명부터 필요하겠구나.
고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중의 한 명이긴 한데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던 사람인 것 정도는 너도 잘 알고 있을거야.
원래 예술하는 사람치고 정신머리 온전하게 박힌 사람이 드물잖니.
가셰 박사는 그런 고흐를 치료한 정신과 의사였다.




마을을 찾은 돈 없는 예술가들에게 경제적인 원조도 좀 해주고,
대화를 나누면서 이따금씩 모델도 서 준 소울메이트라고도 할 수 있지.
약초에 특히 정통한 의사라고는 하더라.
고흐가 그린 초상화에서도 턱을 괴고 있는 반대편 손으로는 약초를 쥐고 있어.
그림을 그리는 일이야 말로 최고의 치료법이라고,
고흐더러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더구나.
하지만 환자인 고흐가 결국 자살한 걸로 봐서는 소문만큼 의술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은 것 같아.

















“흥, 또 가난한 예술가 지망생이 한 명 왔구만. 그런데, 자네는 어디 출신인가?
일본? 중국? 아, 한국이라고.. 고흐가 일본을 참 좋아했었는데, 일본인이 아니라니 아쉽구만.
뭐 그럼 어디 천천히 한번 둘러보고 가게나.
맘에 드는 사진을 가져온다면 내 한 장 살 수도 있네.”
하는 말이 그림에서 막 들려 오는 듯 하는 것이 그래도 인품은 훌륭한 사람 같다.








이 아저씨가 고흐 말고도 세잔, 기요맹, 피자로 같은 화가들을 많이 도와줘서 후세에 이름을 남겼으니,
죽어서도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싶다.
원래 시장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에 촌동네 의사가 도시보다 돈은 더 잘 번대매?
이 양반이 그냥 돈만 잘 버는 시골 의사였으면 우리가 이사람 이름을 알게 될 일은 절대로 없었을거야.
그러니 우리도 나중에 돈 잘 벌게 되면 가난한 사람도 좀 도와주고 그러자.
혹시 아냐 그 중에 한 명이 우리보다 더 잘될지.








7월초인데 여기는 장마라는 개념이 없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그냥 햇볕만 쨍쨍허다.
이제 ‘까마귀 나는 밀밭’이 그려진 풍경으로 찾아가야 하는데
가셰의 집을 지나 한참을 걸어도 지도에 표시된 밀밭은 도통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는구나.
내 몸은 점점 바짝바짝 말라간다.
여긴 빠리보다도 약간 북쪽인데 유럽 남부의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어떡하려고 벌써부터 이렇게나 더운지 모르겠다.
아스팔트 위로 개구리를 한마리 얹어 놓으면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자글자글 알맞게 익을 것 같구나.
유럽의 여름은 습기가 없이 건조하여 한낮이라도 그늘 아래로만 가면 시원한데
이 골목으로는 그늘이 없다는게 문제다.










한가지 좋은 소식을 들려주자면, 늬 형은 지금, 막,
자살한 고흐의 정신상태를 완벽히 이해하게 되었단다.
자, 자, 가만히 들어보렴. 형이 뭔데 고흐를 이해했냐면서 코웃음은 치지 말고.
이 새끼야 그래도 난 니 형이야.










글쎄. 길에서 만난 마을 할아버지께 밀밭으로 가려면 얼마나 더 걸어야 하냐고 물었어.
내가 불어를 한게 아니고, 그냥 지도에 있는 고흐 그림을 보여드린거지.
할아버지의 불어 대답을 알아 들은건 역시 아냐.
여태 내가 땀을 삐적삐적 흘리면서 기다시피 걸어 온 방향을 가리키면서
넌 잣됐다 하는 표정으로 호들갑스럽게 울라울라 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눈치채지 못하기란 쉬운일이 아니지.




어째 이런 깡촌마을 안내소에서 그 보기 드문 ‘한글지도’를 그것도 ‘공짜’로 준다 싶었어.
손으로 그린건지 발로 그린건지 의문이 드는 지도 꼬락서니를 봤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고작 이것 때문에 한참을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왔다니 이가 갈리는구나.
돌아가는 길에 안내소에 다시 들러서
“지도 이거 완전 개판이잖아요. 내가 고쳐줄 테니 이대로 다 다시 만드세요.
무슨 선진국이 이래? 하긴 금속활자는 우리가 몇 백년은 더 일찍 만들었지?”
라고 뒤집어 엎을 생각이란다.
나 하나 고생한건 그냥 참아 넘길 수 있지만 다음에 오는 배낭족들도
나랑 똑 같은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자 다시 고흐를 이해했다는 것으로 돌아가자. 고흐가 죽은게 7월말이었다더라.
그래, 지금이 7월초니까. 이런 태양 아래에서 이 따위 중국산만도 못한
엉터리 지도를 보면서 한 달을 지냈다가는 나라도 미치광이가 되어버렸을 것 같아.
이미 미친 상태였던 고흐 같은 사람이라면, 한 걸음 더 나가서 죽는 일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거다.
다시 말해서, 이 형은 고흐를 이해했어.
이해의 수준이 겨우 그 정도냐고 콧방귀 끼지 말라니깐.
우리 까다롭게 굴지 말자. 형은 고흐를 이해했다고 했지,
고흐의 그림세계를 이해했다고는 하지 않았어.
다른 사람들은 고흐가 무슨,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느낌과 감정대로,
영혼이 일러주는 표정과 목소리를 그렸다고는 하는데 나는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다.
난 단지 똥구녕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주제에
그 비싼 물감을 펑펑 짜다 바른 그림을 하루에 한 장 꼴로 그려댔다는 사실에
감명 받아서 이곳을 찾은 것 뿐이야.



















여하간 나는 잘 모르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으니까 이사람 그림이 수천억씩이나 하는거겠지.
왠지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그냥 ‘뭔가 느낌이 온다’는둥 말을 잘 꾸며서 이야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너니까 내가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거야 임마.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밀밭과 마을 교회를 찾아내서,
사진을 찍다가 만난 ‘혼자 다니는 한국 여자 배낭족♡’이랑 이빨을 까다보니
마을 안내소를 뒤집어 엎는다는걸 깜빡했구나.
아주 참한 인상의 미인이었거든.
그것도 그림이라고 그렸냐고 둘이서 정신 없이 고흐 뒷담화를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빠리 생라자르역으로 돌아와있더라고.








다음 배낭족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미 어쩔 수 없게 되었다.
혹여나 니 주변에 유럽여행을 간다는 친구가 있으면,
오베르쉬르우와즈의 안내소에서 주는 한글지도는 절대 믿지 말라고 꼭 좀 전해 주려므나.








이만 줄일란다.
형이 그닥 모범적은 학생은 아니라서, 공부 열심히 하란말은 차마 떳떳하게 못하겠다.
다만 자기 전에 발은 꼭 씻고 자고, 여름방학 후회 없이 알차게 보내렴.
구미 내려가면 엄마 아빠 따라 산에도 좀 가고 그래라.
맨날 PC방 가서 오락만 하지 말고 자샤. 행복해라.


2006. 7. 2 혼자 잘나신 느네 형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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