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맛있는 저녁식사를 먹을 수 있다는 점 말고도, MIJE는 장점이 많은 숙소다.
가장 큰 메리트가, 시내 한복판, 빠리시청 바로 뒤편이라는 황송할 정도로 좋은 위치다.
왠만한 볼거리는 걸어서도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빼어난 이점인지는 여행을 조그만 해 본 이라면 누구나 잘 알 수 있다.
























엎어지면 코 닿을만한 거리인 노트르담 성당을 구경 갔다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라텡지구를 거닌다.







마차들 다니라고 닦아 놓은 길에서 그랜다이져 같은 큰 차를 굴렸다간
주차할 장소도 마땅치 않거니와 차도, 도로도 남아나지 않으리라.
메르세데스 벤츠사에서 내놓은 이 2인승 스마트카는 만만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어지간한 소형차보다 훨씬 안전하지만, 또 그만큼 비싸기도 하단다.








세느강의 남쪽, 라텡지구는 분명히 지성의 요람, 소르본이라는 명문 대학이 있던자리이다.
지금도 소르본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붙어 있지만,
소르본이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과 함께 유럽의 3대 대학이라는 것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 정부는 학벌문제를 없애기 위해
프랑스의 모든 대학들을 완전히 통합하여 평준화 시켰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이자 대학입학시험 ‘바깔로레아’를 통과한 프랑스 학생이라면
누구나 집에서 가까운 대학을 다니며 전국 어디서든 동질의 교육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있게
하려는 취지라 한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정부 앞에서는 소르본도 과거의 잘나갔던 시절을 뒤로 하는
그냥 인문사회학 특성화 빠리 제4대학일 뿐이긴 하다.
하지만 ‘소르본’이라는 문구가 주는 뉘양스가 내게는 여전히 대단하게 다가온다.
제 아무리 평준화 된 대학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학벌을 무조건 최고로 치는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입장에서 과거에 소르본이었던 곳을
나라 전체에 널리고 널린 수 많은 대학들 중의 하나와 동일한 범주에 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빠리에 대학이 생긴지는 무려 800년이나 되었다던데,
800년 동안이나 대학생들을 선발하고 가르쳐 오면서 고민한 결과가
평준화라는 커다란 결단이었으리라. 



만약에 우리나라가 프랑스처럼 대학간판들을 다 떼버리고 정부가 실력 있는 교수들을
이리저리 옮겨 가면서 대학들을 평준화 시켜버린다면, 하는 상상은 참 재미있다. 



일류라는 서울대 조차 세계 100위권에도 못 미치는데 여기서 하향평준화를 시켜서 어떡하냐는 둥,
대학의 자율권 침해라는 둥, 아마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면서 들고 일어나는 사람도 좀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 있어서 지금 같은 입시지옥이 있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고작 열 대여섯 살 먹은 동생들이 주말도 없이
온종일을 치이고 살 것을 강요 당하는 비극은 좀 빨리 없어졌으면 좋겠다.












“실례지만, 같이 앉아도 될까요?”



약간 어수룩한 억양이지만 틀림 없는 미국식 영어다.
영어라고는 통할 여지가 없는 프랑스 온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영어만 들어도 모국어를 들은 것 마냥 반갑다.


눈도 크고 코도 크고 입술도 두껍고 미끈미끈하게 생겨 먹은데다가
덥수룩한 머리 꼴을 보아하니 샤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할 것 같은 백인녀석이다.


라텡지구에 있는 학생식당에서 국제학생증을 보여주고 혼자 식사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로 붐비는 점심시간이다 보니 비어있는 테이블을 찾을 수가 없었나 보다.


내쪽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빠리에서 영어를 잘 하는 친구를 만나기란 흔한 일은 아니니까.



부모님은 네델란드인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났고, 열 살 이후로는 독일에서 자랐으며,
지금은 빠리의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어서 어쩌다 보니 플라망어, 영어, 독어, 프랑스어 4개 국어를
하게 되었다는 이 에드가라는 친구 참 대단하다.
게다가 다니는 학교는 그냥 대학도 아니고, 소르본이 아닌가. 겸손한건지 뭔지,
이 친구 말로는 외국인은 프랑스어만 할 줄 알면 입학이 어렵지 않다고,
학비도 공짜나 다름 없다고, 빠리에서 공부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면
와서 한 번 알아보라고 진지하게 이야기 해 준다.



“신경 써 주는건 고마운데, 내가 인문학에 관심이 없는건 아니지만
놀기 좋아해서 공부는 글렀다.
더구나 혀가 짧고 머리가 나빠서 영어도 어버버 하는 판에
프랑스어까지 배우려면 앞이 깜깜하다.
난 그냥 한국에 있는 우리학교 졸업하는 걸로 만족할란다.
근데 이놈의 나라는  어쩌면 영어가 이렇게나 안 통하는지 모르겠다.”
이 잘난 친구가 과연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던 차에
프랑스인들의 영어실력에 대하여 교묘히 화제를 돌려본다.



배낭족들끼리 나누는 프랑스인들의 영어실력에 대한 이야기들이란 뻔하다.
우선 이 친구들이 프랑스가 최고라는 자부심 때문에 일부러 영어를 안 쓴다라는 주장이 있고,
아니다 단순히 영어를 못해서 안 하는 것뿐이다라는 반론이 있다.
똑같은 패턴이다. 이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들을 접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후로 대략 15분 동안, 4개국어 마스터에, 라틴어를 교양으로 배우고 있으며,
앞으로는 스페인어를 배울 계획을 갖고 있다는 이 반짝반짝 소르본 3학년생의,
프랑스인의 영어실력에 대한 일장 연설이 이어진다.



이 친구의 말에 따르면, 우리 배낭족들이 항상 하는 이런 어떻게 보면
둘 다 맞는 말일 수도 있고, 또 둘 다 틀린 말일 수도 있는 것 같다.



프랑스 친구들이 대체로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건 사실이다.
빠리에서 누군가에게 영어로 길을 물어봤는데, 영어를 알아듣는 눈치가 틀림 없는데도
대답은 프랑스어로 하더라는 이야기는 흔하다.
그러면서 '이 새끼들 뻔히 영어 잘 알아들으면서 쓸데 없는 자존심 때문에
일부러 프랑스어 쓰는거야.'라고
이를 갈게 되더라는 평가도 필연적으로 따라 붙는다.



하지만 그 프랑스친구는 영어를 정말로 못하는게 맞다.
길을 물어보는 정도의 초급 회화 정도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가깝기 때문에
간신히 이해할 정도인데,
그런 수준으로는 도저히 영어로 설명까지 해 줄 수는 없다보니,
그저 자신이 영어를 가까스로 알아 들은것 처럼,
상대편도 프랑스어를 알아 듣겠거니하는 단순한 생각에
열심히 울랄라 하고 설명을 해 주는 거란다.



문제는 영어를 못하는게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왜 영어를 배우지 않느냐다.
그 이유가 바로 프랑스어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다.


수백년간을 티격태격해온 영국의 언어가 세계공용어가 된 것이 배알이 꼴린 탓이라고
감정적으로 해석하는것 만으로는 좀 무리가 있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외국인이 프랑스어를 익혀야지,
프랑스인이 굳이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있을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프랑스어는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등과 같은 라틴어군에 속해 있다.
이들 언어들끼리는 상당히 유사해서, 가령 프랑스 사람이 이탈리아로 가서
프랑스어로만 이야기 하더라도 그럭저럭 의사소통이 될 정도란다.



그리고 특히 문법 구조가 명확하고 구체적이라서 사후에 혼란을 방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유럽내에서 외교 문서를 작성할 때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기도 한단다.



마지막으로 프랑스혁명전의 귀족 시대에는, 온 천지의 내로라 하는 왕가와 귀족들이
모두 프랑스에서 모임을 가지곤 했었다.
프랑스 왕궁은 교양 있는 사교계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었고,
따라서 프랑스어를 한다는 것은 지성과 교양의 상징이었다.
아직까지도 유럽의 많은 사립학교들이 프랑스어를 교양으로 채택하고있고,
특히 영국의 명문 사립학교들은 프랑스어를 제2의 모국어 수준으로 교육시키고 있다.
프랑스어는 교양어이자, 외교어였던 것이다.



유럽에서 영어가 독보적인 공용어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의 젊은층은 그럭저럭 영어를 하는 편이지만,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 중에서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은 정말 찾기 힘들다고 한다.









“읍.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 난 이만 학교로 돌아가야 해.
함께 식사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 빠리에서 좋은 시간 보내렴. 안녕.”




지 할말만 다 마치고 먼저 일어서는 에드가의 기운찬 뒷모습을 보니
어깨에 힘이 풀리고 입 맛이 딱 떨어진다.


나는.. 나는.. 억지로 갖다 끼우자면 구미사투리를 중심으로 서울말과 대구사투리를
자유자재로 옮겨 다니면서 구사할 수 있으며,
문경사투리와 영어도 어느 정도 가능한데,

저 친구는 이제 학교로 돌아가면 친구들과 프랑스어로 이야기 할 테고,
수업은 라틴어로 듣겠지. 부모님과 전화통화 할 때는 플라망어를 쓸거고,
고향친구를 만나서는 독일어로 떠들거다. 소르본 애들은 다 이럴까. 

굳이 소르본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유럽애들이 다 이렇다.
온 동네가 트인 환경에서 살아온 그들이 이웃들이랑 부대끼다 보면
외국어 몇 가지쯤 익히는 모습이 오히려 당연한 일인 듯도 싶다.
그리고 우리도 유럽 같은 환경에서 태어났더라면 4개국어는
그리 대단한게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거늘, 동쪽 끄트머리의 외딴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는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그리 쓸모도 없는 3개 지방 방언으로 만족해야 한다.
세계를 무대로 놀아 보려면 이런 무지막지한 친구들을 상대해야 하는가.




간신히 먹고 살 수준의 영어를 배우는데만 10년이 훨씬 더 걸렸는데,
이걸 의사소통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수준으로까지 끌어 올리려면,
여기다가 추가로 일본어나 중국어 같은 제2외국어 하나라도 탑재하려면,
갈수록 태산이다. 머리 속이 아찔하다.
세상이 내가 어릴 때 생각하던 것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