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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녀석에게서 전화번호를 받았다.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전화를 하려는데, 먼저 전화벨이 울린다.

연주의 전화다.    빨리 경서에게 전화하고 싶어서 그녀와의 통화가 불편하다.

"어머님께서 전화하셨어요.  당신에게 전화하니 통화중이시라며 저에게 말씀하시더군요.  이번주 토요일이 아버님 생신이시라고 멜치씨는 모를테니 그날 잊지말고 저녁 7시까지 집으로 오라 하시네요."

그녀가 하는 말이 건성으로 들린다.

"듣고 있어요?  아버님 생신은 첫번째인데 선물은 뭘로 준비할까요?"

"당신 좋을때로 해요."  나는 그녀에게 대충대충 대답하였다.

흥분제를 맞은것처럼 쿵덕거리던 마음은 그녀와 통화로 조금 진정되었다.   경서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하는 고민을 주중 내내 했지만, 결국 하지 못하고 토요일이 되었다.

연주는 아버지 생신선물을 사가지고 온다고 나보고 먼저 집에가서 어머니를 도와주라 하며 늦어도 5시까지는 도착하겠다고 한다.

퇴근 후 바로 집에와서는 어머니를 도와주기는 커녕, 내방 전화기 앞에서 지금이라도 경서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을 했다.   그녀도 직장인 인지라 지금 시간이면 퇴근을 할 시간인데 더 늦으면 월요일이나 연락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수화기를 들고 그녀 사무실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가더니 전화를 받는다.  "네.  이경서입니다."   낮익은 너무나도 그리웠던 목소리가 수화기로 너머에서 들려온다.  깜짝 놀라 수화기를 내려 놓아버린다.    잠시후 다시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른다. 

"네. 이경섭니다."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숨소리를 듣는다.

"멜치구나.  조만간 너에게 전화 올줄 알았어...  대구 교회 친구가 너와 통화하면서 나 귀국했다고 말했는데 혹시 실수한것 아니냐고 연락왔었어..  조만간 결혼한다며?..........   축  하  한  다 ..........."

"만나자.  너를 만나지 않고는 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어"

"휴우..........  그래 늦기전에 한번은 만나야지.   언제가 좋겠니?"

"지금.  지금 너의 사무실 앞으로 갈께 한시간이면 돼."

어머니에게 7시 전까지는 오겠다고 하고는 서울행 기차를 타기위해 수원역으로 한걸음에 갔다.

3시쯤 서울역 앞 LG CNS 빌딩 로비에서 그녀를 만났다.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매력적이였다.  


예쁘게 미소를 짖고 있는 그녀와 악수를 나누고 예전과 같이 목적지 없이 걸었다.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지 알어? 너희집, 너의학교, 교회 모두 다녔지만, 아무도 알려주지를 않더라.   아니 너희 가족 외에는 아무도 모르더군.  네가 그리 떠나고 너무 힘들었어.  왜 그런거니. 왜?"

"우리가 서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때 우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어.  헤어져 있는 시간 말이야...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진실로 서로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 받기 위해서는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했어"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인정받기 위해 헤어져야 했다니..

"작년 여름에 귀국하였다며...  왜 연락 안했니?"

그녀가 조금 뜸을 들이더니 말하였다.   " 너에 대한 소식은 일본에서도 계속 듣고 있었어.  네가 군인일때 나에게 제대하면 하고 싶다는 그 공부를 한다는 이야기도, 그리고 합격했다는 이야기도..."

" 그래서 작년에 귀국 후 8월쯤이였던가..   어느 무더운 여름날 너의 사무실로 찾아갔지.  현관 로비에서 너의 사무실로 전화를 연결하는데 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더니 어딘가를 빨리 가더라.."

"뒤 쫒아 가봤지.   어느 자그마한 해장국 집으로 들어가더군.  그곳에서 너는 너무나 선해보이는 여성분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점심식사를 하더라.   네가 국물을 후룩후룩 마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그분의 얼굴에서 행복함을 읽었고..... 내 자리는 더이상 네 곁에 없구나 라고 생각했어."

" 이제 내 가슴속에 남아있는 너에대한 기억을 지워야 할것 같아.  너는 이미 나에대한 기억을 지운것 같은데..."

나는 비명 지르듯 말했다. 

" 아냐... 아냐...  그건 아니야...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너만 원한다면 난 그 결혼을 취소할 수도 있어."  난 내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녀의 마음을 잡으려 발버둥을 쳤다.

"멜치야.  그렇게 무책임하게 행동하기에는 우리는 이제 너무 나이가 많아.  각자가 걸어온 길이 너무 멀어졌어.  내가 너의 곁을 말없이 떠난 시간은 3년간 이였어.  그정도 시간이면  나와의 추억만으로도 너 혼자인 시간을 이겨내고, 우리때문에 상처입은 모든 분들의 상처가 아물어져 우리가 다시 만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줄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무 길게 잡았나봐..."

아.................   그녀를 기다리지 못한, 그동안 계속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내 잘못이였다.

"지금 내가 너를 받아들일려면 내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냐..  중요한건 너의 의지야.  난 예전에 그러했잖아.  하지만 멜치 너는 그렇게 못해.  넌 나 같이 독하질 않으니까......"

"나에게서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 말고 새로운 출발을 시작해  멜치야...."

그녀와의 재회는 이렇게 끝났다.   다시 만날것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서울역 지하에서 악수를 나누고는 그녀는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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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스러운 정신에 어떻게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   귓가에는 계속 그녀의 말이 맴돌았다.

" 중요한건 너의 의지야.  난 예전에 그러했잖아..."     "잊혀지는것을 두려워마..."

집에 도착하니 근 7시가 다 되어갔다. 어머니는 한창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고 아버지는 아직 귀가전이셨다.  어머니는 연주가 5시부터 와서 널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딜갔다 왔냐며 내 방에 있다고 말씀 하신다.

방문은 닫혀있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 정리하지 못한채로 문을 여니 연주가 책상에 없드려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일이란 말인가.

가까이 다가가니 처리해야지 처리해야지 하며 책상 바닥 저 안쪽에 계속 두어온 편지상자함이 열려 편지들이 개봉되어 있고 경서와 찍은 사진 몇장이 놓여있었다.

연주가 인기척에 얼굴을 들고 나를 똑바로 처다보지 못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머님께서 음식준비는 다 되었다며 당신 방에서 좀 쉬라고 하셨어요.  책상위 책들중 볼만한 것을 찾으며  새끼손가락에 끼운 반지를 만지작 거리는데 반지가 헐거워 바닥에 떨어 뜨렸네요.   책상 밑으로 굴러가더군요.  반지를 찾으려고 책상아래를 보니 박스가 하나 있어 꺼내봤더니 편지함이더군요."

"당신이 그동안 여러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 섞여있는 편지들 중에 발신자가 "이경서"라고 된 편지는 따로 분리가 되어있길래 이분이 예전에 당신이 말했던 첫사랑 여성분이라는 것을 직감했어요."

"편지 내용이야 뭐 연인들이라면 의례 주고받을 수 있는 것들이여서 씁씁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그런데......."  그녀가 말을 잊기 어려워 한다.

"그런데 편지봉투 속에는 당신이 그분과 찍은 세장의 사진이 들어있더군요."

"첫번째 사진속의 그분은 흰색밀집모자와 자주색 플레어 스커트를 입었더군요.    두번째 사진속의 그분은 레이스가 화려한 흰색 브라우스와 꽃무늬가 화사하게 프린트된 치마를 입고 있구요.  마지막 사진속에서는 무릅까지 내려오는 회색 모직 코트를 입고 있네요."

" 이 사진속의 옷들은...... 그동안 당신이 나에게 사준 옷들과 똑같은 디자인과 색이였어요"

"그리고 그녀의 머리스타일.  지금 내가 하고있는 바로 등까지 내려오는 찰랑찰랑 웨이브진 머리이죠."

"당신은 근 1년여를 나랑 사귀어 오면서 예쁘다, 참하다, 귀엽다는 말은 했어도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나에게 커플 반지를 주던 상견례 날,  내가 행복감에 젖어 나를 사랑하느냐고 용기내어 물어봤어도 당신은 미소만 보내줄 뿐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연주는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이 진정 사랑하는 것은 나 인가요.  아님 이경서씨를 닮은 그녀의 그림자인가요?"

"난...      난,  당신에게 무엇인가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는 나에게 연주는 눈물을 훔치느라  얼룩진 얼굴로 말했다.

"연락하지 마세요.  그분을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당신을 받아드릴순 없어요...."

그녀는 문밖에서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그녀를 달래려는 어머니에게 "죄송합니다."라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현관문을 열고 가버렸다.

그녀가 책상위에 던지듯 둔 사진을 보니 나랑 같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연주인지 경서인지 눈이 흐려져 잘 구분되지 않았다.

(계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