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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미국 프로 야구계를 풍미했던 영웅이자 어떻게 보면 이단아였던 한 선수가 오늘 은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렉 매덕스

1966년 4월16일 생으로 내년이면 만 43세가 되는 매덕스는 6일(이하 한국시간)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를 통해 은퇴 의사를 알렸습니다. 오는 10일 라스베가스에서 열리는 윈터미팅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식 은퇴를 선언한다고 합니다.

영웅!
사실 이 칭호가 실제로 어울리는 스포츠 선수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 23년간 매덕스는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호령하며 팬들에게 끝없는 경이와 존경과 그리고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던, 진정한 야구 영웅이자 야구 전도사였습니다.
파워가 호령하던 시대를 살면서 매덕스는 전혀 다른 야구를 했습니다. 기교파의 대명사, 컴퓨터 제구력의 사나이, 두뇌 피칭의 교과서, 피칭의 천재.......
그를 묘사하는 칭찬의 언어들은 모두 이 시대 야구의 전형인 힘, 파워와는 먼 거리가 있는 정교함과 냉철함, 예리함 등의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본 기자가 받은 느낌은 그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매덕스는 마치 거센 물살을 가르면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시대의 흐름을 비웃으며 파워만이 생존법으로 여겨지던 시대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살았습니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칼날처럼 예리한 피칭으로 단순한 파워를 뛰어넘는 더욱 파워풀한 자신의 영역을 단단하게 구축했던 선수였습니다.

박찬호 취재를 하면서 애틀랜타에서 매덕스를 처음 만났을 때 꽤 놀랐습니다.
보통 야구 선수들, 특히 투수들을 직접 눈 앞에서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TV에서 혹은 멀리서 볼 때보다 체격이 훨씬 크고 장대하기 때문입니다. 190cm가 넘는 투수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매덕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클럽하우스에서 대면한 매덕스는 182cm의 키에 그저 평범한 체격이었습니다. 데뷔 당시 몸무게가 66kg이 안됐다는데 처음 보았을 당시는 75kg 정도. 그날 매덕스는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딱 선생님 내지는 교수님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어떤 천재성을 엿보게 했습니다.

1986년 시카고 커브스에서 데뷔, 2년째까지 8승18패에 평균자책점이 5점대 중반이 넘던 매덕스는 95마일의 와일드한 포심 패스트볼을 앞세우던 설익은 강속구 투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커브스의 딕 폴 투수 코치는 매덕스에게 제구력 떨어지는 포심 대신에 예리한 제구력과 공 끝의 움직임이 뛰어난 투심을 주무기로 삼으라는 조언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정말 사소할 수 있는 조언 한마디가 이 선수의 인생을 바꿔놓았고, 야구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습니다.

23년간 4팀(커브스, 브레이브스, 파드레스, 다저스, 그러나 팀을 옮긴 것은 6번)에서 뛴 매덕스 통산 744경기(740 선발)에 출전해 355승227패에 평균자책점 3.16을 기록했습니다. 역대 다승 8위의 대기록입니다.
지난 2001년에는 74.2이닝 연속 무볼넷이라는 경이로운 기록도 세웠고 1992년부터 4년 연속 싸이영상을 수상했으며, 17년 연속 15승 이상에 20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했습니다. 1992년부터 4년 연속 싸이영상을 받았을 당시 그의 기록은 75승29패 평균자책점 1.98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1988년부터 2006년까지 19년간 딱 한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200이닝 이상을 소화했습니다. 23년간 한 시즌 평균 이닝수가 217이닝이 넘습니다.(첫 해 31이닝 포함했으니 실제 162게임으로 환산하면 평균 229이닝 나옵니다.)

그에 관한 기사는 워낙 많이 쏟아졌기에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지만, 제가 과거에 썼던 기사도 참고해서 은퇴하는 매덕스의 대기록들을 최종적으로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발군의 제구력 1
매덕스는 역사상 몇 안 되는 ‘한 시즌 9이닝 당 1개미만의 볼넷’을 기록한 투수입니다. 1997년 매덕스는 232이닝을 던지면서 20개의 볼넷(6개는 고의 볼넷)만 내줘 11.6이닝 당 한 개꼴의 볼넷을 기록했습니다.(9이닝 당 0.77개)
유사한 기록을 세운 투수는 싸이 영(1904년 13.1이닝 당 1개), 크리스티 매튜슨(1913년 14.6이닝 당 1개), 브레트 세이버하겐(1994년 13.1이닝 당 1개) 등이 있습니다.

★발군의 제구력 2
300승+3000삼진 투수들 중 매덕스보다 적은 볼넷(5008.1이닝 999볼넷)을 내준 선수는 130여 년 역사상 딱 4명뿐이었습니다.
퍼드 갤빈(6003.1이닝 745볼넷), 매튜슨(4780.2이닝 837볼넷), 피트 알렉산더(5190이닝 951볼넷), 챨스 레드번(4235.1이닝 875볼넷) 등입니다.

★삼진 능력 1
매덕스는 300승에 3000탈삼진을 기록한 9번째 투수입니다. 통산 3371개의 삼진을 잡은 매덕스는 필 니크로(3342개)를 제치고 역대 삼진 랭킹 10위에 올랐습니다. 기교파 투수이긴 하지만 어떤 강속구 투수들에 밀리지 않는 많은 삼진을 잡아냈습니다.

★삼진 능력 2
이미 3000탈삼진에서 능력이 입증된 매덕스의 유명한 삼진 일화가 있습니다. 98년 인터리그 경기에서 매덕스는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상대로 1시간46분만에 13개의 삼진을 빼앗으며 완봉승을 거뒀습니다. 물론 볼넷은 한 개도 없었습니다.

★발군의 수비
매덕스는 올 해까지 총 18번의 골드글러브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98개의 병살 성공과 546개의 자살(putout)로 빅리그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00년 6월 14일 387개의 풋아웃을 기록하며 잭 모리스의 최고 기록을 넘어선 이래 최고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피안타율보다 높은 타율
1998년 매덕스는 타자들을 피안타율 2할2푼에 묶었던 반면 자신의 타율은 2할4푼을 기록했습니다. 타자로서도 상당히 능력 있는 매덕스는 매년 평균자책점보다 높은 타율을 기록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94년 처음으로 타율 2할2푼3리에 평균자책점 1.56을 기록했고, 98년에도 타율은 2할4푼에 평균자책점 2.22를 기록하는 등 남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그 목표를 몇 차례 이뤘습니다.

★2년 연속 1.70 미만의 평균자책점
2년 연속 만장일치로 싸이영상을 받았던 94~95시즌 매덕스는 각각 1.56과 1.6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습니다. 역사상 2년 연속으로 1.70 이하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것은 ‘데드볼 시대’인 1918~19년 월터 존슨 이래 최초였습니다.

수싸움의 달인
매덕스의 기록들도 정말 입이 딱 벌어질 정도지만 개인적으로 그의 피칭에 더욱 매료되는 것은 타자와의 ‘수 싸움’입니다.
3000안타를 돌파하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웨이드 보그스는 “매덕스는 마치 타자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스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을 먹으면 여지없이 한 가운데 스트라이크가 날아든다. 글러브 안에 수정 구슬이라도 숨겼는지 미래를 내다보는 것 같다”는 말을 했습니다.

한 경기에서 같은 타자에게 단 한 번도 똑같은 스피드에, 같은 구질의 공을 던지는 법이 없고, 공 반개 차이로 마음먹은 곳에 넣을 수 있는 제구력, 그리고 타고난 공 끝의 움직임은 타자들에게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마술사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매덕스는 반드시 다음번 대결을 여두에 두고 타자들을 상대합니다. 타자들의 심리 상태를 자신에게 최고로 유리한 쪽으로 끌어갑니다.

‘믿거나 말거나’로 느껴질 증언도 있습니다. 애틀랜타 시절 정규 시즌에 휴스턴의 강타자 제프 배그웰에게 의도적으로 홈런을 맞은 후 플레이오프에서 다시 만나 같은 구질을 노리던 배그웰을 전혀 다른 투구 패턴으로 꼼짝 못하게 했다는 믿기 어려운 그의 전담 포수였던 에디 페레스의 증언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천재성 운운하는 말을 들으면 “타자의 바깥쪽 낮게 꽉 차는 스트라이크만 던질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천재 투수”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의 친형으로 빅리그의 투수 코치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마이크 매덕스는 동생의 제구력이 타고났다고 증언했습니다. 둘이 1986년 한 해에 루키로 9월에 데뷔해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루키 형제 투수끼리의 맞대결'을 벌이기도 했는데(그렉의 승리) 형 매덕스는 “겨울 동안 몇 개월을 공도 안 잡다가 처음 캐치볼을 해도 그렉은 글러브를 대는 곳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을 꽂아 넣었다”며 동생의 제구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함을 인정했습니다.

코리언 빅리거들과 관련된 일화들
매덕스를 취재하면서 우리 선수들에 관한 코멘트로 몇 차례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97년 7월21일 박찬호가 터너필드에서 삼진 11개를 잡으며 브레이브스를 꺾은 직후에 클럽하우스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당시 매덕스는 “박찬호는 자신감에 넘치는 투수다. 그러나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제구력을 길러야 한다. 강속구 투수들에게는 상당히 까다로운 주문이지만 박찬호가 던지는 내용을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박찬호는 구질이 워낙 까다롭고 최근 자신감까지 붙어 상대하기 정말 힘든 투수다.”라고 했습니다. 제구력을 짚은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난 2003년에는 뉴욕 메츠에서 무서운 상승세를 타고 있던 서재응은 셰이스타디움에서 브레이브스를 완파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경기 후에 매덕스는 서재응에 대해 “제구력이나 투지, 마운드에서의 배짱이나 타자를 상대하는 능력 등 이미 모든 것을 지닌 투수”라고 했습니다.
당시 서재응은 CBS 투수 랭킹 12위까지 오를 정도였으니 매덕스가 칭찬을 할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매덕스와 곧잘 비교되던 서재응은 “매덕스와는 비교도 될 수 없다. 내가 매덕스의 공을 쳐보지 않았다. 76~77마일로 들어오는데도 도대체 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마구다.”라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매덕스와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애틀랜타 클럽하우스에서 봉중근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쪽에서 다가와 어깨를 툭 치기에 돌아다 봤습니다. 그랬더니 매덕스가  깜짝 놀라면서 “어, 난 데니스 마르티네스인줄 알았어. 정말 뒷모습이 똑같네, 미안!” 그러는 거였습니다.
살면서 참 여러 사람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중에 제일 압권이 데니스 마르티네스였습니다. 빅리그 245승에 퍼펙트게임까지 기록한 니카라과의 영웅, 바로 그 마르티네스와 뒷모습이 똑같이 닮았다니 할 말을 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뒷모습도 아름다운 영웅
작년에 매덕스는 파드레스에서 34게임에 선발로 나가 198이닝을 던지면서 14승11패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올 해는 파드레스와 다저스에서 33번 선발에 193이닝을 던지며 8승13패의 성적이었습니다. 8월16일 필리스전 7이닝 1실점 패전을 포함, 퀄리트 스타트하고도 진 경기가 네 번 있었습니다.

여전히 그를 원하는 팀들이 있고, 본인도 마음만 먹으면 아직도 선발 투수로서 한 몫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4년간 계속 4점대의 평균자책점을 보였고, 올 시즌 중반기에 그를 도로 데려간 다저스는 포스트 시즌 선발진에서 매덕스를 제외하기도 했습니다.

본인으로서는 어느 정도 능력의 한계도 느꼈을 테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는 진정한 영웅의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전히 던질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지만 더 이상 추락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팬들이나 언론과 특별히 가깝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스타로서의 본인의 의무와 책임을 절대 게을리 하지 않았던 선수.
누구보다 철저히 경기를 준비하고 상대 타자들을 분석하고 그리고 마운드에서 늘 최선을 다해 투쟁하며 팀에 승리의 기회를 부여하던 승부사.
야구의 피칭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던 제구력과 심리전의 달인.
후배들에게는 늘 조언과 기술 전수를 아끼지 않았고, 팀 메이트로서는 항상 곁에서 하나의 팀을 만들어가던 조용한 리더.

그리고 이제 그는 돌아서야할 때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명예롭게 은퇴한 위대한 투수로 기억될 것입니다. 성격이나 스타일로 봐서 앞으로 공식 석상에서 그를 자주 볼 일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정교하고 또 용감했던 승부사’ 그렉 매덕스의 시대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대의 야구팬들 모두에게 정말 큰 행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