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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 시절 매니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우리가 매니 라미레스(36·외야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능력의 끝을 알 수 없는 현역 최고의 타자 중 한 명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정상급 선수라고 보기에는 곤란할 정도로 부족한 충성도와 집중력이다. 라미레스가 만들어낸 명장면들도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양키스타디움에 서다 (1991년 9월3일)
1991년 '뉴욕 최고의 고교선수'라는 꼬리표를 달고 드래프트에 나온 라미레스는 내심 양키스가 뽑아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양키스는 전체 1순위로 노스캐롤라이나주 출신 고교 좌완투수 브라이언 테일러를 선택했다(보너스 155만). 그리고 라미레스는 13순위에서 클리블랜드가 데려갔다(보너스 25만). 1993년 9월3일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4타수 무안타에 그친 라미레스는, 이틑날 양키스타디움에서 2번째 경기를 치렀다. 라미레스는 가족, 친척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4타수3안타 3타점, 홈런 2개, 2루타 1개로 대폭발했다.

범상치 않았던 신인 (1994년 4월4일)
이듬해 홈 개막전. 8회 라미레스가 친 타구는 원바운드로 담장을 넘었다. 하지만 라미레스는 홈런인 줄 알고 그라운드를 계속 돌았고, 3루심의 저지를 받고 나서야 홈런이 아님을 알았다. 뒤이어 라미레스는 딴 짓을 하다 하마터면 투수 견제구에 걸릴 뻔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주위가 산만한 신인의 출현에 당황했다. 그 외에도 도루에 성공하고도 파울인 줄 알고 돌아오다 아웃을 당하는 등, 라미레스는 또 다른 종류의 볼거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홈런쇼 (1998년 9월 15~19일)
토론토와의 홈경기. 라미레스는 3-4로 뒤진 3회 2번째 타석에서 동점 솔로홈런을 날렸다. 4-4로 맞선 5회 3번째 타석에서는 역전 투런홈런을 쏘아올렸으며, 6-5로 앞선 7회 쐐기 솔로홈런으로 3연타석 홈런을 만들어냈다. 다음날 라미레스는 첫 타석 스리런홈런으로 4연타석 홈런이라는 메이저리그 타이기록을 세웠다. 5회 1개를 더 추가함으로써 2경기 5홈런. 다음날 라미레스는 다시 홈런 1개를 추가, 3경기 6홈런 ML 기록과 타이를 이뤘으며, 하루를 쉰 후 2개를 더 날렸다. 5경기 8홈런 역시 타이기록. 그 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10kg을 불려 스프링캠프에 나타났던 라미레스는 홈런수를 전년도 26개에서 45개로 늘렸다.

보스턴 팬들의 각별했던 매니 사랑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매니 만세 사건 (1998년 챔피언십시리즈 6차전)
1998년 114승을 거둔 양키스에게도 전년도 리그 우승 팀 클리블랜드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클리블랜드가 2승3패 탈락 위기에 몰린 6차전. 양키스는 6-5로 앞선 6회말 1사 1,2루에서 데릭 지터가 타석에 들어섰다. 지터가 밀어친 타구는 우익수 쪽으로 높게 떠서 날아갔다.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공이었다. 하지만 라미레스는 타구 측정을 잘못해 만세를 부르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고, 지터의 타구는 2타점짜리 3루타가 됐다. 6회 3점을 얻은 양키스는 결국 9-5로 승리,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수비시 스타트가 가장 느린 외야수 중 한 명인 라미레스는 평범한 수비를 호수비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한때 라미레스는 펜스에 부딛히는 것에 대해 특히 공포를 느껴 심리치료를 받기도 했다. 

152.7m를 날아간 공 (2001년 6월23일)
2001년 라미레스는 7년간 1억1900만달러를 제시한 클리블랜드를 거절하고 8년간 1억6000만달러 계약에 보스턴에 입단했다. 사람들은 라미레스의 홈런 중 적지 않은 수가 그린몬스터에게 잡아먹힐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라미레스는 홈 데뷔전 첫 타석에서 초구를 그린몬스터 위로 날려버림으로써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6월23일 홈경기. 2회 라미레스는 펜웨이파크의 가장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463피트(141m)짜리 초대형 홈런을 날렸다. 하지만 이것은 예고편이었다. 3회 라미레스는 이 번에는 그린몬스터 위에 매달린 코카콜라병 조형물의 위를 넘어가는 무시무시한 홈런을 날렸다. 라미레스의 홈런은 501피트(152.7m)로 측정, 테드 윌리엄스가 세운 502피트(153m) 펜웨이파크 기록에 아슬아슬하게 미치지 못했다. 7월2일 라미레스는 토론토 스카이돔에서 다시 491피트짜리를 쏘아올렸다. 호세 칸세코의 종전기록을 깨는 스카이돔 최고기록이었다.

뿔뿔이 흩어진 그들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매니를 피하라 (2001년 6월5일)
그 해 라미레스는 무척 외로웠다. 노마 가르시아파라가 부상으로 이탈하자 상대 팀들은 라미레스만 거르면 됐다. 그 해 라미레스가 기록한 25개의 고의4구에는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얻은 2개도 포함돼 있었다. 6월5일 연장 18회까지 진행된 디트로이트전에서, 라미레스는 8회 1사 2루, 10회 1사 2루, 14회 2사 1루, 16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모두 고의4구를 얻어냈다. 그리고 디트로이트의 라미레스 거르기는 완벽히 성공했다. 1경기 고의4구 4개는 로저 매리스가 1962년에 세운 아메리칸리그 기록과 타이. ML 기록은 1990년 안드레 도슨이 16이닝 경기에서 기록한 5개이며, 배리 본즈는 9이닝 경기 기록(4개)을 가지고 있다.

리버스 스윕 (2003년 10월6일)
오클랜드와의 디비전시리즈. 1,2차전 원정경기를 모두 패한 보스턴은 3,4차전 홈경기를 모두 잡아 2승2패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작된 원정 5차전 최종전은 전년도 사이영상 1,2위 투수인 배리 지토와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팽팽한 투수전으로 전개됐다. 4회 오클랜드는 호세 기엔의 2루타로 선취점을 얻었다. 5회까지 무실점으로 버텼던 지토는, 그러나 6회 선두타자 제이슨 배리텍에게 동점 솔로홈런을 허용했다. 그리고 이어진 1사 1,2루에서 라미레스에게 시리즈를 내주는 결승 스리런홈런을 맞았다. 보스턴은 오클랜드의 맹렬한 추격을 뿌리치고 4-3으로 승리, 리버스 스윕을 통해 챔피언십시리즈에 진출했다.

매니 실종 사건 (2005년 7월19일)
1-1로 맞선 6회초. 웨이드 밀러가 2사 만루에 몰리자 테리 프랑코나 감독이 마운드를 다녀갔고 경기가 재개됐다. 하지만 잠시 후 관중석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라미레스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관중들이 다같이 '매니 매니'를 연호하자 그제서야 라미레스는 그린몬스터 밑 스코어보드 룸의 문을 열고 슬며시 나왔다. 라미레스는 밀러가 초구를 던지는 순간까지 정상적인 수비 위치에 있지 못했고, 2구째에서야 제 위치에 왔다. 그리고 뒤이어 라미레스 앞에 떨어지는 2타점짜리 결승 좌전안타가 나왔다. 결국 보스턴은 1-3으로 패했다. 이 패배로 1승6패 부진에 빠진 보스턴은 당시 분위기가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프랑코나 감독도 경기 후 쓴소리를 했다. 하지만 라미레스는 "잠시 에어컨 바람을 쐬러 갔을 뿐"이라며 태연했다. 한편 펜웨이파크의 스코어보드 룸에는 에어컨이 없다.

이제는 어디로?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매니 빙 매니 (2005년 7월31일)
당시 라미레스와 보스턴의 갈등은 악화 일로에 있었다. 보스턴은 라미레스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놨고, 라미레스는 보스턴을 떠나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보스턴-메츠-탬파베이의 3각 트레이드가 진행됐다(보스턴 캐머론-허프, 메츠 라미레스-바에스, 탬파베이 밀리지 등 유망주들). 라미레스가 7월30일에 이어 7월31일에도 선발 라인업에서 빠지자 트레이드는 결정된 듯했다. 오후 4시. 경기 중인 펜웨이파크에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라미레스의 트레이드 발표 소식 없이 마감시한이 지나간 것. 다음날 라미레스는 '매니는 매니(Manny being Manny)'라는 피켓을 들고 나와 새출발을 다짐했다. 케빈 밀라가 만들어준 문구였다.

케이로드를 무너뜨리다 (2007년 10월5일)
디비전시리즈 2차전. LA 에인절스가 잠자는 라미레스의 수염을 건드렸다. 그날 라미레스의 자존심은 짓밟혔다. 바로 앞 타석의 데이빗 오티스가 고의4구 2개를 포함해 4개의 도피성 볼넷을 얻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던 것. 9회말 1사 2루. 케빈 유킬리스를 삼진으로 잡아내 2사 2루를 만든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는 또 오티스를 거르고 라미레스를 상대했다. 하지만 로드리게스와 에인절스는 곧 그 대가를 치렀다. 2구째 패스트볼이 한가운데로 들어오자 라미레스의 방망이가 번쩍 했다. 라미레스가 두 팔을 번쩍 든 순간, 관중들은 모두 일어났고 공은 그린몬스터를 훌쩍 넘어갔다. 로드리게스는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