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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의 베이스볼포엠] 아버지의 플레이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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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부터 모르는 선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등번호만 보고도 선수의 이름을 정확히 맞췄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보세요. 이 아이는 야구에 대해 정말 모르는 게 없다니까요!”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내 자랑을 하게 바빴다. 그럴 때면 나 역시 아버지를 흡족하게 해 드렸다는 마음에 무척 기뻤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나는 단순히 야구광인 아버지를 둔 꼬마에 불과했다. 야구를 정말 사랑하게 된 건 실업 롯데선수였던 정현발 씨에게서 사인볼을 받고 나서부터다. 아버지는 우연히 구장에서 만난 당시 홈런타자 정현발 씨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제 아들놈이 무척 팬입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렇습니꺼. 아드님 이름이 우에 됩니꺼.” 정현발 씨가 물었다.
“동희인데예.” 내가 끼어들었다.
“뭐라꼬? 동희? 인마 똘똘하게 생긴네. 자, 야구공. 니 커서 야구장 많이 와야 한데이. 알았제?” 정현발 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유명스타를 처음 본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젊은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꼬맹이 아들은 아들대로 더 깊이 야구에  빠졌다. 아들은 지금도 야구인이라면 정현발 씨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부유한 살림과는 거리가 멀었음에도 내게 최고의 야구 장비를 사주셨다. 동네에서 야구글러브와 나무 배트 일체를 갖춘 야구소년은 내가 유일했다. 비록 세무(섀미)재질의 글러브라 몇 번 사용하면 여기저기가 찢기고, 배트는 그립 부분이 쪼개지게 마련이었지만 야구를 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왜냐?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땀을 뻘뻘 흘리시며 글러브를 꿰매고 배트의 그립부분을 못으로 박아주셨기 때문이다. 지금도 눈을 감고 손을 뻗으면 아버지의 땀이 손등을 적실 것만 같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했던 캐치볼은 아직도 내겐 가장 값진 추억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그때 아버지와 내가 주고받은 건 공이 아니라 부자(父子)의 정(情)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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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본가를 찾을 때면 여전히 아버지는 TV 앞에서 야구를 보고 계셨다. 아버지의 등만 본다면 30년 전 그대로였다. 그러나 더 이상 아들은 아버지의 무릎에 누워 야구를 보지 않았고 아버지도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야구의 룰을 가르치지 않았다. 60대의 아버지와 30대의 아들은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야구를 볼 뿐이었다.

게다가 아들이 야구기자인데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야구에 대해 일체 묻는 법이 없다. 어째서일까.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피곤할까 봐 그러시지.”

따지고 보면 30대가 넘은 뒤로, 아버지와 야구 이외의 일에 대해서도 별로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 “밥 먹었니?” “식사하셨어요?” “자고 가라.” “주무세요.”가 대화 전부였다. 영웅이 이렇게 변할 수도 있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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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고엽제의 정체를 깨닫는 데는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고엽제의 영향으로 자주 병원을 오갔고. 결국, 보름 전 폐암 수술을 받으셨다.
중환자실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입원생활에 필요한 몇 가지 물품을 챙길 요량으로 본가에 왔다. 어머니가 신신당부하신 아버지의 안경이 보이지 않았다. 온 집안을 뒤졌다.

비디오테이프로 빼곡한 서랍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예전부터 비디오 녹화가 취미셨다. 재미난 프로그램이 있으면 꼭 녹화를 하셨다. 은퇴 후는 더 했다. 손녀딸의 재롱이나 각종 모임 장면을 캠코더로 담아 비디오테이프로 편집하는 걸 소일 삼아 하셨다. 그런 이유로 내 키 만한 서랍장 안은 수많은 비디오테이프로 가득했다.

그때였다. 서랍장 하단을 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어야 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오르고 결국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서랍장 하단을 가득 채운 비디오테이프엔 온통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2006년 0월 0일 박동희 000 프로그램 출연’ ‘2007년 0월 0일 박동희 00-00 중계’ ‘2008년 0월 0일 박동희 00 중계 해설’ ‘2008년 박동희 00 뉴스 출연’….

그리고 그 위 서랍장엔 컴퓨터를 할 줄 모른다던 아버지가 출력한 내 기사가 A4용지들로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태어나서 그날만큼 내 발등에 무수히 많은 물방울이 떨어진 적도 없으리라.





내 주변을 맴돌던 아이를 불렀다. 아이의 아버지가 바로 앞에서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이에게 손에 쥐고 있던 오래된 사인볼을 건넸다. "자, 받아. 네 꺼야."

물론 정현발 씨의 사인볼은 아니다. 초등학교 때 받은 이만수 SK 코치의 사인볼이다. 야구기자가 되서도 항상 가방에 들고 다니던 사인볼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왜 내 눈엔 그가 내 아버지로 보였던 것일까. 어째서 내 눈엔 그가 나무배트에 못을 박던 젊은 아버지로 비췄던 것일까. 무슨 영문으로 내 입에서 "괜찮다."라는 말 대신 내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던 것일까….

아버지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한다. 전쟁도 어쩌지 못한 분이니만큼 ‘툭’ 털고 일어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아버지에게 찾아온 병마는 그저 이번 이닝의 위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반드시 다음 이닝을 향해 ‘플레이볼’을 외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비가 그치면 아버지와 함께 꼭 야구장에 갈 생각이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295&article_id=0000000250&date=20090511&m_url=%2Flist.nhn%3Fgno%3Dnews295%2C0000000250%26sort%3DgoodCount




개인적인 호불호가 갈린다고들 하지만, 이만큼 글 잘 쓰는 야구기자도 드물고
이만큼 야구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기자도 드물고
이만큼 사람의 감성을 두드리는 글을 쓰는 기자도 드물죠

이번엔 기사라기보단 수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