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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審判)에서 ‘판(判)’은 칼로 물건을 반으로 자른다는 의미다. 칼로 자르듯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 그가 바로 심판인 것이다. 

 

그러나 칼이 정확한 판단이 아닌 심판의 사리사욕에 동원될 때, 그때부터 칼은 흉기가 되고, 경기는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다.

 

엠스플뉴스는 프로야구 승부조작을 탐사 취재하며 정확한 판단에 사용돼야 할 칼이 심판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도구가 됐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칼이 결국엔 프로야구의 생명인 공정성과 투명성을 반으로 자르는 파탄의 무기가 됐다는 걸 알았다. 이야기의 시작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직 KBO 심판 A 씨는 고교 졸업 후 1988년 모 구단에 입단했다. 당시 그의 신분은 연습생(육성선수)이었다. 좋은 체격조건이 눈에 들어 프로 유니폼을 입었지만, 정작 그의 프로 생활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2군 활약상이 두드러지지 않은 까닭에 그의 1군행은 계속 실패로 끝났다. 결국 그는 1990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야구계를 떠난 건 아니었다. 반대였다. 그는 1991년 KBO 심판이 되면서 야구계의 심층부로 발을 들여놓았다. 심판이 된 그는 무명선수 시절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심판이 되자마자 선참 심판들의 눈에 띄었고, 20대에 벌써 프로야구 1군 경기 구심을 맡는 행운을 누렸다. 그즈음 심판진의 신구교체가 이뤄지며 ‘젊은 심판’이던 그가 반사 이익을 누렸다는 게 야구계의 증언이다.

 

‘호불호’가 갈리던 A 씨는 연차가 쌓이면서 더 막강한 힘을 갖게 됐다. 선참 심판이 되면서 어느덧 KBO 심판진을 대표하는 ‘베테랑 포청천’이 됐고, 심판들 사이에서 그의 한마디는 무시 못 할 가이드라인이 됐다. 각종 시상식에서도 ‘올해의 심판상’은 그의 차지였다.

 

문제는 그의 ‘막강한 힘’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쓰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A의 선배 심판은 엠스플뉴스에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A는 내가 심판일 때도 ‘노름’에 빠졌던 친구다. 동료 심판 상당수가 이를 알고 있었고, KBO도 눈치 채지 않았을까 싶다. 밤을 새웠는지 충혈된 눈으로 구장에 나타났다가 선배 심판으로부터 혼 난 적도 있었다. 속으로 ‘이런 친구가 계속 심판을 맡으면 큰일인데’하고 걱정했지만, 내 걱정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A 씨의 도박 탐닉은 변할 줄 몰랐다. 이 때문에 A의 가정사 역시 순탄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급기야 A 씨는 도박비를 충당하기 위해 ‘절대 해서는 안 될 행위’를 실행에 옮겼다. 바로 구단에 돈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5년 모 구단 단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A의 전화였다. A는 이 단장에게 다짜고짜 “싸움에 휘말렸다. 상대가 다쳐 합의금이 필요하다. 죄송합니다만, 급하게 돈이 필요한데 300만 원만 꿔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 단장은 갑작스러운 전화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현직 심판 A의 위상을 잘 알았던 터라, 돈을 빌려주기로 했다. 이 과정을 잘 아는 전직 구단 직원은 “단장님께선 이미 A가 돈을 갚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며 “이 건으로 ‘돈 빌려달라’는 전화만 다시 안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으로 안다”고 회상했다.

 

그라운드 안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던 A에게 이 구단은 ‘No’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당장 판정 불이익을 당할 게 뻔하다고 믿은 까닭이었다. 물론 한편으론 ‘돈을 받았으니 우리에게 유리한 판정을 해주겠지’하는 기대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단발성 요구’라 판단해 이 구단은 오래 고민하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니었다.

 

A는 2006년에도 이 구단에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취재 결과 이 구단은 그해에도 A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공교롭게도 A가 구심을 본 경기에서 ‘이 구단이 반사이익을 취했다는 의심을 살만한 여러 장면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A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른 구단에도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한 구단 단장은 “A가 ‘개인적으로 급히 돈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단장님을 믿고 전화 건 거다. 수백만 원만 꿔달라’고 요구해 심사숙고 끝에 ‘미안하다’는 거절 의사를 밝혔다”며 “그 이후 다시는 A로부터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돈 요구’에 응하지 않은 이 구단은 A로부터 판정 불이익을 받았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이 구단 단장은 “우리가 판정 불이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모르겠다”며 “어쨌거나 우리는 A에게 돈을 준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구단의 다른 관계자는 "돈을 준 것으로 안다"고 말해 상반된 입장을 나타냈다.

 

A의 ‘돈 요구’는 2013년까지 계속된 것으로 드러났다. 2012, 2013년엔 모 구단 사장에게 전활 걸어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사장은 1, 2회 A에게 돈을 건넸다. 놀라운 건 A의 요구가 2회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A는 다시 이 사장에게 전활 걸어 돈을 요구했고, A의 요구에 지친 이 사장은 단장에게 “앞으로 당신이 알아서 A에게 돈을 주라”고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이 구단은 “우리가 돈을 빌려준 건 사실이지만, 이후 심판 판정에서 도움을 받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엠스플뉴스 조사 결과는 달랐다. 해당 기간 이 구단은 A가 주심으로 나선 다수의 경기에서 전체 구단 중 가장 낮은 1점대의 평균자책을 기록했다. 투수력이 매우 약하기로 소문난 해당 팀 전력을 감안하면, 이례적일 정도로 낮은 수치다. 

 

A의 요구액은 보통 300만 원 이상의 고액이었다. 어쩔 땐 500만 원을 받아가기도 했다. 원체 돈을 받은 기간이 길고 횟수가 많아 A의 총비위액은 족히 수천만 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몇몇 구단에는 “집을 이사했다”는 빌미로 해당 구단 계열사에서 생산하는 고가의 제품을 가져오게 유도하는 일도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제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는 물론 지불하는 법이 없었다. 만약 구단이 제공한 제품이 성에 차지 않을 때는 판정으로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과연 A는 이 돈을 어떻게 쓴 것일까.

 

A와 친했던 한 이는 “심판 월급과 여기저기 구해온 돈 대부분을 도박비로 탕진했다”며 “오랜 심판 생활 동안 모은 돈은 고사하고, 빚만 잔뜩 진 거로 안다”고 귀띔했다.

 

최소 10년 가까이 구단에 돈을 요구했던 A의 비위 행위가 들통난 건 2013시즌이 끝나고서다. 야구계에 ‘A가 도박에 빠졌다, 지인들로부터 자꾸 돈을 꾸러 다닌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면서 이 소식이 KBO 수뇌부 귀에까지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KBO 사정을 잘 아는 한 야구 관계자는 “KBO가 A의 비위행위와 관련해 자체 조사를 벌였다”며 “조사 결과 A의 비위행위가 사실이라고 판단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했다”고 전했다.

 

고심의 결과는 ‘은폐’였다. 2014시즌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KBO는 ‘A 심판이 개인 사정(건강상의 문제)으로 심판직에서 물러났다’고 밝혔다. 당시 엠스플뉴스 기자도 똑같은 말을 KBO로부터 들었다. 

 

구단 단장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현직 단장은 “언젠가부터 A 씨가 보이지 않아 KBO에 물었더니 ‘개인사를 이유로 스스로 심판을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왜 심판을 그만뒀는지, 그가 심판을 볼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단장은 KBO로부터 표면적인 사직 이유라도 들었으니 다행이다. 

 

다른 현직 단장은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KBO가 아닌 다른 심판한테 들은 내용”이라며 “KBO 누구도 A와 관련해 어떤 이야기도 들려준 적이 없다”고 목소릴 높였다. 이 단장은 “리그 존립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임에도 KBO가 단장회의에서조차 이 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고 분개하며 “설마 이런 비위 심판에게 KBO가 퇴직금을 지급하진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엠스플뉴스가 KBO에 문의한 결과 A는 권고사직 처리된 것으로 확인됐다. 권고사직은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퇴직을 권유하고 근로자가 이를 받아들여 사직서를 제출하는 형식으로 근로관계를 종료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권고사직 처리되면 퇴직금이 지급된다.

 

만약 A가 심판으로선 절대 해선 안 될 비위행위를 벌인 걸 알면서도 KBO가 A를 권고사직 처리했다면 이는 큰 문제다. A 씨의 돈 요구에 응하지 않았던 대표적 구단은 L이다. 엠스플뉴스가 확보한 자료에 L 구단은 A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으로 나타났다. 

 

L 구단 전 관계자는 “A로부터 ‘합의금이 필요하니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에 ‘이 늦은 저녁에 어떻게 돈을 보내줄 수 있느냐. 미안하다. 못 들은 거로 하겠다’고 거절했다”며 “시간이 흐르고 KBO 관계자로부터 ‘A가 스스로 심판직을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엠스플뉴스 조사 결과 해당 구단은 A가 주심을 본 경기에서 수 년간 지속적으로 이례적일 만큼 나쁜 평균자책과 승률을 기록한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구단이 이 기간 매우 좋은 성적을 기록한 점을 감안하면,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힘든 수준의 기록이다.  

 

이 관계자는 A가 스스로 물러난 게 아니라 권고사직했다는 말에 “정말이냐”고 되묻고서 “이런 문제라면 KBO가 단장회의나 이사회에 안건으로 올려 자세한 설명을 해줬어야 한다. 하지만, KBO는 그 어떤 설명도 들려주지 않았다. 이는 KBO가 대주주인 구단들을 속인 것”이라며 “어떻게 ‘스스로 물러났다’는 말을 그리 태연하게 했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혀를 찼다. 

 

다른 야구 원로 역시 KBO의 대응에 큰 유감을 표했다.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면, KBO는 조용히 권고사직 처리할 게 아니라 심판 비리와 판정 문제를 일소하는 기회로 삼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원로는 "2012년 승부조작 사태가 터졌을 때 KBO는 승부조작을 일소하려 하기보다는 꼬리를 자르고 묻으려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때 제대로 근절하지 못한 결과가 지금 더 큰 승부조작 사태로 돌아온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8월 1일 엠스플뉴스로부터 A 씨와 관련된 질의를 받은 KBO 고위 관계자는 "판정에 대한 잦은 논란 때문에 평가위원회를 열었다"며 "평가 결과가 좋지 않아 A를 권고사직 처리했다"고 답했다. 2014년 3월 ‘일신상의 이유로 심판직을 그만뒀다’는 입장보다 한 단계 진일보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진실과는 거리가 먼 답변이었다.

 

구단과의 돈거래 사실을 KBO가 인지했는지에 대해서도 이 고위 관계자는 "전혀 들은 바 없다"며 A가 금품을 제공한 구단에 유리한 판정을 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다"고 전면 부인했다.

 

KBO의 답변이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는지는 조만간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모 경찰청에선 이 사건의 첩보를 수집해 이른 시일 안에 수사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다행인 건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각종 프로야구 승부조작과 관련해 강도 높은 대책을 수립 중이라는 것이다. 여기다 국회 차원에서도 ‘국민 스포츠’인 프로야구의 승부조작 사태와 관련해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소 10년 가까이 진행된 심판의 구단 갈취와 기획 판정, 아니 승부조작에도 이를 관리 감독해야할 KBO는 넋을 놓고 있었다. 무엇보다 진실을 밝히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이 찾아왔음에도 A의 비위행위를 은폐하는데 바빴다. KBO의 뼈를 깎는 반성과 자정 노력이 요원한 가운데 이제 야구계 개혁과 변화는 그라운드 밖에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야구계의 각종 현안이 ‘닫힌 밀실’에서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더 가까이 ‘열린 광장’을 향해 가고 있다. 그것이 시대의 요구일지 모른다. 최근 KBO는 승부조작 사건과 관련해 ‘자진 신고 기간’을 정해 선수들이 진실을 들려주길 바라고 있다. 이제 KBO가 자진 신고 기간을 활용할 차례다. 

 

+ 취재 후 :A는 강원도 정선 카지노에서 구단 최고위층에게 전활 걸어 “돈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대담한 요구였다. 더 대담했던 건 자신의 실명 은행 계좌로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지워질 수 없는 치명적 흔적을 남긴 것이다. 엠스플뉴스는 이 문제와 관련해 후속보도를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