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1.
3월 24일. LA. 한국 야구 대표팀이 일본에게 연장전끝에 석패하면서 준우승을 차지한 그날, 이전 경기에서 오가사와라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던 왼손투수는 그날 마운드를 밟지 못했다. 일본과의 첫 경기에서의 부진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부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에이스라고 생각했던 그의 부진이 이 날만큼 아쉬운 적은 없었다. 그래도 그는 WBC 준우승 팀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그의 이름은 김광현이었다.

LA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한 지역. 한 청년이 TV로 뚫어지게 야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청년은 '내가 저기에 섰어야 했는데…'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계속 아쉬움을 곱씹고 있었다. 고교시절 라이벌이라 불리던 선수는 어느새 한국에서 MVP를 수상하고 저 자리에 있는데 지금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면서. 언젠가 재활을 끝낼 그날을 기다리는 그를 LA 에인절스 수뇌부는 이렇게 불렀다. 정영일이라고.

같은 시각, 한국의 잠실 구장. 관객석을 가득 채운 관중들이 전광판으로 비치는 화면을 보면서 아쉬움을 표하고 있을때 홈팀 라커룸에서 한 선수가 동료들과 함께 물끄러미 TV에 시선을 던졌다. 그의 마음 역시 정영일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점이라면 그는 기나긴 재활의 터널을 뚫고 서서히 공을 던지고 있다는것 뿐. 언론에서는 매일 그의 투구를 보고 '광속구의 부활!'이라고 치켜세웠지만 아직은 시범경기중. 정규시즌은 아니다. 그의 같은 구단 입단 동기는 이미 태극 마크를 달았다. 부상만 없었다면 자신도 그 목록에 이름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썩 잘 어울리는 흰색 바탕의 두산 홈구장용 유니폼의 등부분에는 11번이라는 배번이 커다랗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의 이름 석자도. 이용찬.


2.
2005년 한국 고교야구는 그야말로 최고의 투수진 뎁스를 자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봄부터 시작된 한기주의 센세이션으로 시작된 열풍은 아시아청소년선수권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아쉽게 일본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그때 보여준 선수들의 재능은 향후 한국 야구의 밝은 미래를 꿈꾸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해 드래프트에서 많은 투수들이 프로에 지명되었다. 유원상, 한기주, 나승현, 배장호, 류현진, 양승진, 신창호, 원종현, 윤동건, 김성훈, 손영민, 박경태, 김용성, 차우찬, 김상수, 조용훈등. 다들 한번쯤은 이름을 들어봤을 선수들이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짙다고 한다. 우수한 선수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던 2005년에 비해 2006년 학번은 그 상대가 되기엔 약간은 부족했다. 어디까지나 전해에 비해서. 분명 평균보다 훨씬 좋은데도 말이다. 여러 선수에 나눠졌던 언론의 시선은 김광현과 정영일 쌍두마차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 해에는 그 두 선수 말고 좋은 투수들이 상당히 있었다. 경남고의 원투펀치 이상화, 이재곤과 천안북일고의 장필준, 장효훈 콤비, 서울을 대표하던 이용찬과 임태훈, 이원재, 경북 NO.1 투수 김상걸, 동성고의 마이스터 양현종과 공주고의 트윈테러 김태식, 이웅한, 직구만 따지면 프로에서도 통한다던 김혁민과 김강률, 그리고 세상 누구보다도 낮은 릴리즈 포인트를 보여준다던 박세진까지. 아니, 충실함만 따지면 이쪽도 2005년에 비해서 만만치 않았다.


3.
모두의 예상대로 2005년 드래프티 투수들은 무사히 프로야구판에 안착했다. 류현진은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로 성장했고 한기주는 걸출한 클로저가 되었다. 유원상은 금년 선발 한자리를 호시 탐탐 노리고 있고 배장호와 나승현은 롯데 불펜진에서 중요한 선수들이다. 손영민을 빼면 기아의 잠수함은 얘기가 안될지도 모른다. 차우찬과 조용훈은 삼성과 히어로즈의 미래라고 할 수 있다.

김광현은 류현진의 전철을 밟았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 원투펀치를 논할때 역대에 보기 드물게 왼손 투수들이 언급되고 있고 그 중심에는 류현진과 김광현이 있다. 임태훈은 데뷔와 동시에 프로를 대표하는 홀드맨으로 자리를 잡았고 양현종도 계속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혁민은 팀 입단 1년 선배 유원상과 선발 자리를 다투고 있다.


4.
4년전 아시아청소년선수권을 본 사람이라면 SK에 입단한 김성훈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 그는 부상으로 신음하다가 방출되어 현재 공익근무 중이다. 신창호는 투수 컨버전후 결국 부상에 시달리다가 방출당했고 윤동건 역시 마찬가지다. 박경태 역시 수술을 받았다. 현 고교야구제에서 그들 역시 혹사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울수 없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한기주는 부상을 안고 있고 류현진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다.

정영일의 수술 후 재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와 청룡기 결승에서 쇼다운을 펼쳤던 이상화 역시 부상을 당했다. 이용찬은 모두 알다시피 부상후 간신히 재활을 마쳤고 김상걸은 팔꿈치 수술후 방출된후 은퇴를 선택했다. 직구가 일품이던 김태식도 부상의 악몽을 피할수 없었다. 그나마 같은 파트너였던 이웅한은 그 굴레를 피했다. 하지만 과연 부상을 당하지 않고 버티게 될 투수는 몇명이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김광현의 SK 입단은 그에게 있어서는 인생 최고의 축복인지도 모른다.


5.
작년 LG는 정찬헌과 이범준이라는 걸출한 두명의 신인 투수를 건져내는데 성공했다. 안치홍, 봉중근의 활약과 더불어 작년 LG팬들에게 몇 안되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LG팬들이 애당초 기대를 건건 그들이 아닌 이형종이었다. 눈물의 역투로 대표되는, 일본에 사이토 유키가 있다면 한국엔 이형종이 있다는 그 이형종. 그러나 그도 팔꿈치에 칼을 댔다. 기아팬들이 기대를 걸었던 145Km의 잠수함 전태현도 마찬가지였다. 시카고 컵스로 건너간 이대은이라고 예외는 될수 없었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 언급했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선수중 1세대중 몇명 - 박찬호, 김병현, 조진호 - 을 제외하고 팔꿈치 성한 선수 없었다고.

2006년 고교야구 기록을 보면 총 9명의 선수가 50이닝을 넘게 던졌다. 그중에는 정영일의 92이닝과 김광현의 82이닝도 포함되어 있다. 프로의 50이닝은 별것 아니지만 고교야구의 50이닝은 그 차원을 달리한다. 거기에는 연투와 과다 투구가 당연하다는 듯 들어가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정영일, 김광현, 이상화의 경기당 평균 투구수는 100개가 넘었다.

2007년에는 11명의 투수가 50이닝을 넘겼다. 하지만 효천고의 오호성 이상 많이 던진 투수는 없었다.(78.1이닝) 대신 경남고 에이스 하준호는 오호성과 더불어 1000개가 넘는 공을 던졌다. 이는 어디까지나 공식경기에서 기록된 수치다. 하준호가 걱정되는 이유중 하나다. 게다가 그의 하드웨어는 그렇게 좋다고 말할수 없다.(174cm) 정찬헌이 걱정되는 이유도 바로 저기에 있다. 하준호는 최소한 2군에서 1년 있기라도 했다.

작년에는 9명의 투수가 60이닝을 넘게 투구했다. 효천고-롯데의 진명호는 똑같은 테크를 탄 김수화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30%는 되어 보인다. 한희는 과연 LG의 2군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정성철은 장민제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작년 최다이닝 투구 순위에는 인상적인 이름이 들어가 있다. 유일한 2학년. 그는 바로 진흥고의 김정훈이다. 금년 고교야구 NO.1 투수라는 김정훈. 그를 보면 오버랩 되는 선수가 있다. 직계선배 정영일. 정영일이 과도 이닝을 소화한것도 2학년때였다. 그는 김진우가 될까 정영일이 될까 아니면 김정훈이 될까. 그건 신만이 안다.

* 자료 출처 : 천리안 아마야구 사랑 조지승님 자료.


6.
대학진학. 이것은 고교야구팀에게 있어서 지상명제와도 같다. 전국대회 4강이라는 조건은 에이스를 혹사시킬 수 밖에 없는 풍토를 만들고 있다. 한 팀에 에이스급 선수가 2명이상이라면 다행이지만 이용찬의 경우는 그것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걸 에이스의 숙명이라고 불러야 할것인가. 특히 8강 진출 팀이 거의 고정변수에 가까운 경우 & 약팀의 에이스라면 그 혹사도는 더욱 더 심해진다. 박철우 감독은 무등기 우승을 위해 청룡기에서 혹사당한 정영일을 결승까지 등판시켰고 결국 우승기와 부상을 맞바꾸는 결과를 낳았다. 이형종이 우승했다면 그의 부상은 조금 덜 아쉬웠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의 부상이 가려지는건 아니다. 한때 노회찬 의원이 한때 이상한 소리를 해서 한바탕 아마야구판이 시끄러워지긴 했지만 그렇게 무작정 벗어난 말은 분명 아니었다. 제도적 보완이 없는 한 현재의 투수 혹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 돌아갈 것이다. 실력이 뛰어나다면 별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르지만 엘리트 스포츠 체제하에서 혼자서 진학한다는건 그 후로 몇년동안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걸 무심코 받아넘길 수 있는 선수가, 아니 가족이 몇명이나 될까. 필요악과 같은 현재의 제도에 한숨만 나올 뿐이다.


7.
많은 선수들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부상을 당하고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하고 있다. 정영일은 그중에서도 복받은 케이스다. 최소한 언론에 보도라도 되었으니까. 어린 선수뿐만이 아니다. 프로에서도 혹사를 당한 선수들은 부상이라는 암초에 걸리게 되고 그들도 부상→수술→재활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중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하라 히데노리의 작품 '그래!하자!'에서는 작게 나마 재활의 어려움이 나온다. 실제 재활은 이보다 수십배, 수백배는 힘들다. 말 그대로 자신과의 싸움이다. 그걸 포기한다고 해서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러나 그들은 재활의 길을 선택한다. 야구가 좋고 팬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름 그대로 프로다. 팬이 있기에 존재하는 선수들. 그들을 기다려주는 팬이 있기에 그들은 기나긴 재활의 길을 선택하고 다시 마운드에 오른다. 선수를 기다려준 팬들은 그의 투구가 어떻든 간에 다시 마운드에 선 그를 반갑게 맞아주고 환호해준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재활을 선택하는지도 모른다. 몇번이고 재활을 이겨낸 이대진에게 에이스 오브 에이스라는 수식어가 과분하지 않은 것도, 두번의 수술을 이겨낸 임준혁을 골수 팬들이 높이 평가하는 것도 다 그런 맥락이다.

며칠전 정영일에 관한 글을 쓰고 다시 정영일 선수의 싸이월드 홈피에 가봤다. 그 이후 4개의 새로운 방명록이 적혀 있었다. 모두 정영일 선수를 격려하는 내용들이었다. 우리에게는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작은 기다림, 작은 말 하나는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된다. 한명이라고 기다려주는 팬이 있다면 그들은 마운드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예전처럼은 아니더라도 다시 마운드에서 공을 뿌리게 될것이다. 비록 잘못된 제도와 얇은 선수층의 결과로 그들에게 부상이라는 굴레가 씌워졌지만 그 굴레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팬들의 몫이다.

과거에 그들은 빛났다. 현재 그들은 빛나지 않는다. 1년뒤, 아니 3년뒤, 아니 미래에 그들은 빛날 것인가. 그것은 선수와 팬의 오랜 2인3각 경주일지도 모른다.

결승선은 혼자 도달하는것이 아니다.

* 블로그에 썼던 글을 옮겼습니다. 재미없는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청룡기 대회를 보고 이 글을 보니 생각할께 많아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