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송지선 아나운서를 보내며...

옛날 기억을 하나 꺼내 봅니다.



제가 고3이었던 시절.. 유난히 야구가 재미있던 해이기도 해서...
(최근 야구열풍이 불 때까지 그 해가 역대 관중동원 2위였던 해로 자리를 지켰었죠)

당시 우리반 애들은 정말 모두가 야구에 미친듯이 빠져 있었죠.


서울에 있는 고교여서 그런지... OB, LG는 물론이고.. 쌍방울까지.. 숫자의 차이는 있었지만, 저희반에는 8개구단팬이 모두 포진하고 있었죠.

야구경기가 펼쳐진 다음날 아침이면.. 애들은 여기저기 모여 몰래 가져온 스포츠신문을 돌려보며, 어제 패배한 팬들에게 온갖 비아냥을 시전하며 깔깔거리는 일상...

전날 OB가 지기라도 했으면, 가급적 애들 몰래 교실에 들어오곤 했죠.



당시는 케이블 TV가 없던 시절...

야구장을 가지 않으면 경기를 보는게 쉽지 않았죠. 기껏해야 주말에 공중파 TV로 보는게 전부였으니.. 그때는 가끔씩 평일에도 중계를 해주긴 했지만 말이죠.



고3시절이라서 매일 밤 학교에 남아 야간자율학습을 해야했는데...

수요일, 목요일에는 이런 저런 핑계로 땡땡이 치는 애들이 많았죠. 하지만 화요일은 땡땡이 치는 친구들이 거의 없었죠.



두 가지 이유때문이었는데...

첫째는.. 매주 화요일은 아이큐점프(드래곤볼 연재)와 소년챔프(슬램덩크 연재)가 나오는 날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또 매주 화요일은 라디오로 야구 중계를 해주는 날이었기 때문이죠.



화요일이면 교실에 앉아 슬램덩크 차례를 기다리며, 친구와 함께 몰래 이어폰을 나눠 끼고 야구중계를 듣곤 했죠.

당시는 AM이었던 SBS라디오도 야구중계를 해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신선했던건.. 그때 SBS 라디오 야구중계를 해줬던 아나운서중 여성분이 계셨죠.

생긴지 몇년 안된 신생 방송사의 참신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SBS에서 파격적인 시도를 한 것이라 생각되어지는데...

어쨌든 당시 야구중계를 듣던 저희들에게는 꽤나 혁신적인 사건이었죠.



여성 아나운서가 야구를 중계하다니!!!



그러던 어느날... 아직도 대충 기억이 납니다.

OB와 해태와의 경기였나?


박빙의 스코어가 유지되며 종반으로 치닫던 경기...

해태가 천금같은 득점 챤스를 맞이합니다.


2사 3루. 타석에는 이순철.



온 맘 다해 베어스가 그 위기를 넘겨주길 기도하며 이어폰이 꽂혀있는 오른쪽 미간에 힘을 줍니다.

순간 '와~'하는 야구장의 함성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전해지더니.. 잠시 뒤 여성 아나운서의 경쾌한 멘트가 터져나옵니다.

'안타~ 이순철선수가 친 공이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빠져나갔습니다! 주자 1, 3루!'



응???????????

주자 1, 3루?????????????



분명 제가 잘못 들은건 아니었습니다.

해태의 패배를 기원하며(LG와 해태가 엄청 라이벌이던 시절이었슴다 ^^;) 같이 야구중계를 듣던 LG팬 녀석도 고개를 갸우뚱 거립니다.



'3루 주자는 왜 안뛰었을까? 원아웃도 아니고 투아웃이었는데...'

하지만.. 라디오에서는 그 의문을 풀어줄 아무런 해답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생각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었지만...

'어쨌든 점수 안줬으면 됐지 뭐..' 스스로를 위로(?)하며 생각하기를 멈춥니다.



이순철선수의 안타가 터지고..

끈질긴 승부를 펼치던 다음 타자의 승부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 여자아나운서가 작은 소리로 이야기합니다.


'방금전의 안타때 3루주자가 홈에 들어왔군요. 점수는 몇대몇입니다'



헐...........



이것 말고도 그 여성 아나운서는 인터넷시대였으면 꽤나 화제가 되었을 만한 '어이없는 야구중계 어록'을 참 많이 양산해 냈었죠.


반에서도 그 여성 아나운서는 이슈거리였습니다.

대개..

'여자 아나운서도 좋지만, 야구를 좀 아는 사람을 시켰으면 좋겠다'라는 반응이었죠.


과연...

우리나라에도 야구를 제대로 아는 여성 아나운서가 등장할 날이 올까?








하지만... 그 분 이후의 여성 야구 아나운서는 기억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등장한 것이 바로 송지선 씨였죠.




당연히.. 야구팬들은 열광할 수 밖에 없었죠.

지금이야 여성야구팬들도 많아졌지만.. 원래 야구팬의 근간을 이루던건 젊은 남성팬들이었으니...



그래!

송지선씨와 같은 사람이야말로 고딩시절 꿈꾸던, 야구를 좋아하고, 야구를 잘 아는, 그런 여성 아나운서(리포터)야!






그런 의미에서 송지선씨는 감히 한국 프로야구사에 한 획을 그었던 분이라고 얘기하고 싶네요.

공식적인 '최초'는 아니지만...


제 마음속에서 '제대로 된 최초의 여성 야구 아나운서'



그래서 그녀의 죽음이 다른 유명 연예인들의 죽음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먹먹하게 마음을 울린 것이 아닐까 싶네요.



지금쯤...

그녀는 영원히 머물러 있을 곳에 도착했을 것 같네요. 오늘 발인이라 했으니.



다시 한 번 명복을 빌며...

제 기억속의 '최초의 여성 야구 전문 아나운서'로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