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어려서 야구한 추억은 없는데;; 수지님 글을 읽으니 언젠가 읽었던 기사가 떠올라서 퍼왔어요.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는 어른들이 오랫만에 모여서 야구한다는 내용이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생각났는데, 전 그 책이 좀 싫더군요. 어렸을 때 삼미 따라다니던 얘기는 정말 짠하고도 재미있었는데, 마지막 부분에 다른 팀이랑 야구하는 부분이 참 마음에 안 들었어요. 자기네 방식의 야구를 할 수도 있는 거지만, 야구는 어차피 상대팀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인데, 자기네는 그저 자기네 방식의 야구만 할 뿐이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일방적인 자기네 방식의 야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팀을 얕잡아보는 것 같아서 별로더라고요.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9800.html

세기의 명승부로 기록될 만한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준결승전과 결승전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숨 막힐 듯 팽팽한 긴장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실력들, 치고 달리고 던지고 받아내는 동물적인 감각들,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진 야구장의 공기 …, 선수들은 ‘야구란 바로 이런 것’임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야구가 얼마나 재미있는 경기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나에게도 야구의 재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경기가 있다. 추석이 다가오면 나는 그날의 그 시합이 떠오른다.

아마 4~5년 전쯤이었던 같다. 추석 연휴 전날 고향 친구 ㄱ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용건은 간단했다. 함께 야구를 하자는 것이었다.

“난 야구 해본 적도 없어.”

“추석 전날 친구들끼리 야구하기로 했는데 18명 모으기가 쉽지 않네. 나와서 자리나 채워줘.”

“미팅도 아니고 야구 경기에 자리 채우는 게 말이 되냐?”

“그냥 재미로 하는 건데 뭐. 재미있을 거야.”

결국 나는 승낙을 하고 말았다. ㄱ의 말처럼 재미있을 것 같았다. 얘기를 듣는 순간 불가능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혹시 내가 홈런을 쳐서 영웅이 될지도 모르지. 멋진 다이빙캐치로 팀을 승리로 이끌지도 모르지. 참가 선수들의 목록을 들어보니 3분의 2 정도는 내가 아는 친구들이었다. 작은 동네다 보니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고 친구였다. 준비물은 필요 없었다. 서울에서 사회인 야구 동호회에 참가하고 있는 친구 몇이서 야구방망이, 글러브, 공, 보호 장비 등을 준비해 온다고 했다. 승낙하고 보니 점점 겁이 났다. 대부분 아는 사이라곤 했지만 10년 넘게 만나지 못한 친구들이었다. 그런 친구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까 걱정이 됐다.

연휴가 시작됐고, 나는 자동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뒷좌석에다 체육복과 운동화도 챙겼다. 차가 막혔다. 나는 자동차 속에서 자주 스트레칭을 했다. ‘내일의 시합을 위해서’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시합은 무슨, 망신만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라는 생각이 이어서 들었다. 무릎도 아팠다. 5시간 넘게 운전을 해서 고향에 도착했다.

다음날 경기장에 가보니 열 명 넘는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10년 만에 보는 얼굴도 있었지만 곧바로 이름이 기억났다. 엊그제 만났던 것처럼 모든 얼굴이 가깝게 느껴졌다. 한쪽 구석에서는 포수장비까지 갖춘 누군가와 서울에서 소방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가 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한 친구가 명함을 나눠주고 있었다. 별다른 이견 없이 편이 나뉘었다. 왼쪽에 서 있던 한 무더기와 오른쪽에 서 있던 한 무더기. 포지션을 나눌 때는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나는 외야수 안 할래. 저기까지 언제 갔다 오냐?”

“4번 타자 시켜줄게, 외야수 해.”

“4번 타자 좋은 게 뭐 있냐. 나 9번 할 테니 1루수 시켜줘.”

마흔이 가까워오는 30대 중반의 남자들이, 한 집의 가장이기도 한 사람들이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성격은 좋고 창피당하는 걸 싫어하는 나 같은 친구들이 주로 외야로 향했다. 외야에 서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저 멀리서 친구들끼리 떠들고 있었고,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고, 먼지가 날렸다. 나는 외야에 외롭게 홀로 떨어져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현재에 서 있으면서 고등학교 시절의 일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공은 거의 날아오지 않았다. 외야는커녕 방망이에다 공을 맞히는 친구들도 드물었다. 문제는 투수였다. 서울에서 소방공무원을 한다던 그 친구는 사회인 야구팀에서 투수를 맡고 있었는데 그 실력으로 마음껏 던지니 아무도 쳐낼 재간이 없었다.

“야, 살살 던져.”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그 친구는 정말 살살 던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사라졌다. 살살 던지자 마구 쳤다. 제대로 수비가 될 리 없었기 때문에 공은 여기저기로 흘러 다녔고, 안타를 치고 뛰어가던 친구는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했다. 그래도 2회까지는 그럭저럭 볼만한 경기였다. 3회 때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야구를 해보니 기다림의 시간이 얼마나 긴지 느껴지더라.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했는데, 화가 나는데, 복수를 하려고 하는데, 번호표를 뽑아야 하는 거다. 대기인 수는 7명이다. 기다려야 한다. 그게 야구다. 기다림에 지친 패배자들끼리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주종은 막걸리였다.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면 2번부터 9번까지 술을 마시고, 2번이 타석에 들어서면 나머지 8명이 술을 마셨다. 그래도 모두들 진지하게 게임에 임했다. 열심히 치고 열심히 뛰어다녔다. 안타를 치고 나가는 친구가 있으면 모두들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에휴, 더운데 힘들겠어.”

“그러게 안타는 왜 친 거야, 도대체?”

“술 먹고 저기 서 있으려면 힘들겠네.”

“그래도 안타 치고 나가면 기분은 좋아.”

“너 안타 쳤었나?”

“무슨 소리야, 아까 3루타 치고 홈에도 들어왔는데. 내가 역전시켰잖아.”

“역전시키면 뭐 해, 다시 역전됐잖아. 도대체 몇 대 몇이야? 누가 점수는 적고 있나?”

‘더운데 서 있기 힘들겠다’고 말하던 친구들도 수비할 때가 되면 벌떡 일어나 자기 자리로 갔다. 그렇게 몇 회가 더 지나자 분위기가 정착됐다. 암묵적인 룰도 생긴 듯했다. 타자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술을 마시며 응원한다. 응원은 열심히 한다. 경기를 할 수 없을 만큼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는다. 공수 교대는 신속 정확하게 한다. 반드시 이기려 들거나 일부러 지려고 하지 않는다. 5회쯤이 되자 친구들끼리의 이야기도 깊어졌다. 얼굴도 발갛게 익고 대화도 무르익었다. 점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 꽤 여러 명이 홈을 밟은 것 같긴 한데 - 주고받았던 이야기는 기억난다.

“야, 회사 다니기 힘들다. 내 꿈이 뭔지 알아?”

“뭔데, 정년퇴직?”

“돈 모아서 도시 외곽에다 카페를 하나 멋지게 짓는 거야.”

“카페는 뭐 하게?”

“카페 만들어 놓으면 친구들이 전부 거기서 모여서 사는 얘기나 하는 거지. 명절이 되면 전부 내 카페에 모이는 거야.”

“좋긴 한데 얘들이 술값 내겠냐. 술 먹고 전부 외상 그을 거야.”

“허허허, 먹어봤자 얼마나 먹겠어. 그리고 내가 술 제일 많이 먹으니까 괜찮아.”

“어, 벌써 네 차례다. 홈런 하나 치고 와라.”

가을 날씨여야 했지만 꽤 무더웠고, 시간이 갈수록 친구들의 얼굴은 붉게 변해갔다. 공격할 때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면 수비할 때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공을 빠뜨리면 빠뜨린 사람도 웃고 보는 사람도 웃었다. 누군가 수비를 하다 넘어지면 옆에서 보던 사람은 웃다 넘어졌다. 경기가 끝났을 때 친구들의 얼굴은 술에 익고 햇볕에 익었다. 모두들 기분은 좋아 보였다. 누군가 제안을 했다. “매년 추석 때마다 만나서 야구를 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야, 다음에는 야구도 하고 족구도 하고 축구도 하자.” “와, 그러자.” 그러자고 했지만 여태 다시 모이지 못했다. 아무리 명절이라고 해도 18명의 스케줄을 맞추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죽고, 누군가 다치고, 누군가 아프고, 누군가 일이 터지고, 누군가 도망가는 삶이 계속되고 있다. 다시 그런 야구시합을 할 수 있을까. 추석만 되면 운동장에서 깔깔거리던 친구들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김중혁/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