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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훈은 임태훈이다(사진=두산)

우윳빛 피부다. 피아니스트 손이다. 순하지만 날카로운 눈매다. 키 182cm의 장신에 탄탄한 몸이다. 말은 또 어떤가. 어휘 선택은 그 또래 청년들보다 훨씬 고급스럽다. 감정 표현도 상스럽지 않고 차분하다. 누구나 느끼는 두산 투수 임태훈의 첫인상이다. 그러니까 영락없는 ‘부잣집 도련님’인 것이다.

# 역삼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야구선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동네야구론 성이 차지 않았다.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부모는 반대했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는 야구 대신 공부에 전념하길 원했다. 그도 그럴 게 윤택한 삶이었다. 남부러울 게 없는 가정환경이었다. 굳이 운동선수로 힘들게 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거슬렀다. 그만큼 야구가 좋았다. 하고 싶었다. 1년 동안 아버지와 싸운 끝에 야구부에 입단했다. 지금도 임태훈은 자신이 야구부에 입단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한다. 1997년 11월 7일 금요일이다. 생일은 기억나지 않아도 이 날짜만은 잊지 않는단다. 임태훈에게 야구는 그런 존재다.

# 임태훈이 야구복을 입고 미친 듯이 그라운드를 뛰던 그때, 나라는 외환위기로 미친 듯이 국가부도를 향해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추락하는 ‘대한민국’호엔 그의 가족도 동승하고 있었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는 그즈음 사업가로 변신했다. 지인의 제안이었다. 안정을 뒤로하고 모험을 선택했을 땐 그만한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광풍 앞엔 속수무책이었다. 사업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집안 살림은 기울었다.

임태훈은 어떤 고난과 좌절에도 희망의 새벽별을 노래해왔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인생의 해답을 야구 속에서 뿐만아니라 책 속에서 찾는 이로도 유명하다(사진=두산)

대문이 컸던 개인주택에서 월세 아파트로 이사할 때만 해도 임태훈은 몰랐다.

그에게 ‘위기’는 소리 없이 진행되는, 자신과는 무관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공기를 넣어 부풀린 매트리스에 편안히 누워 있는데 공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그 속도가 원체 느려 머리가 딱딱한 바닥에 닿기 전까지는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조차 느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이윽고 머리가 바닥을 치며 매트리스를 다시 부풀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이수중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부모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식당일부터 시작해 가사도우미까지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라면 열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어린 임태훈은 신문을 돌렸다. 야구부 회비는 스스로 마련하려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인지라, 5층까지 뛰어오르며 임태훈은 항상 같은 다짐을 했다.

‘가족을 위해 반드시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득 ‘훌륭한 야구선수가 무슨 의미’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서울고로 진학하고서 임태훈은 깊이 고민했다. 결론은 간명했다. ‘가난한 집안형편을 고려할 때 지금 당장 할 일은 야구가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돕는 것’이라고.

야구를 때려치우려던 그를 이번엔 부모가 말렸다. “네가 진정 우릴 위한다면 다시 야구공을 잡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훌륭한 선수가 되든 그렇지 않은 선수가 되든 일단 네가 하고 싶은 야구를 계속 하라.”고 타일렀다. “꿈은 어떤 상황에서도 버려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임태훈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전보다 강하게 야구공을 쥐었다. 더 많이 뛰고, 더 많이 던졌다. 자신이 던지는 공 하나하나에 가족의 미래가 달렸음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마운드 위에서 미소를 버리고 ‘돌부처’란 별명을 얻을 만큼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마운드는 더는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오가는 ‘일희일비(一喜一悲)’의 무대가 아니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이 영구적으로 진행되는 전쟁터였다. 18살 소년 임태훈에게 야구는 어느덧 그런 존재가 돼 있었다.

올 시즌 임태훈의 주먹이 더 자주 쥐어질수록 두산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현실이 될 것이다(사진=두산)

# 고 3 졸업반이 됐을 때. 그는 ‘고교 최대어’로 불렸다. 주변에선 ‘LG행’을 권유했다. “부자구단이라, 계약금을 많이 줄 것”이란 게 권유의 배경이었다. 하지만, 임태훈의 생각은 달랐다. 두산행을 바랐다.

두산을 가리켜 “나이와 명성에 관계없이 실력만으로 주전을 뽑는 팀”이라고 하는 소릴 들었기 때문이다. 임태훈은 순간의 계약금보다 빨리 1군 주전으로 정착해 많은 연봉을 받는 게 낫다고 믿었다.

결국, 뜻대로 됐다. 2007시즌 두산의 1차 지명을 받았다. 그것도 4억 2천만 원이나 되는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받으면서.

계약금을 받고 집으로 오던 날. 그는 심장이 떨렸다. 다리는 후들거렸다. 무엇보다 가족을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기여했다는 생각에 몹시 벅찬 감정을 느꼈다. 그렇듯 만감이 교차할 무렵. 300m쯤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눈에 띄었다. 어머니였다.

아들과 어머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부둥켜안고는 한참을 흐느꼈다. 아들은 어머니의 고생이 떠올라서, 어머니는 아들이 대견스러워서 말을 잇지 못했다.

부모는 아들에게 말했다. “네가 받은 만큼 팀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던지라.”고.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해 임태훈은 64경기에 출전, 101⅔이닝을 던지며 7승 3패 20홀드 1세이브, 2.40의 평균자책을 기록했다. 팀은 한국시리즈까지 올랐고 그는 신인왕이 됐다.

베어스의 역대 프랜차이즈 스타 가운데 임태훈은 '최고의 선수'로 기억될 것이다. 야구를 인생 이상으로 생각하는 임태훈이라면 그 이상이 될 것이라는 게 야구전문가들의 공통된 예상이다(사진=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