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도 아닌데 긴 글) 필리핀 세부 효도관광
- 작성일
- 09-05-12 00:07
에피소드 0. 개괄 필리핀.
적도의 약간 북쪽, 아시아 대륙 남동쪽의 서태평양에 산재하는 7천여 개의 섬들로 구성된 나라.
모국어는 따갈어.
그러나 숱하게 많은 섬으로 이뤄진 나라이다 보니 사람들끼리 내왕이 잦지 않아 방언이 다양하고,
방언간의 차이 또한 심함.
타개책으로다가 미국의 식민지배 경험도 있겠다 만국공통어이기도 하겠다 겸사겸사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
미국의 지배 이전에는 마젤란의 스페인에게 400년 가까이 통치를 받음.
덕분에 이전의 전통문화는 죄다 말살.
토속신앙 불교사찰 고유문자 같은 것들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하나도 기대하지 말 것.
필리핀이라는 국명부터가 마젤란 시절의 스페인 황태자 필립2세의 이름을 딴 것.
외에 어지간한 지명은 죄다 스페인식.
그리하여 동남아 국가치고는 하나도 안 어울리게 카톨릭 신자가 80%.
개신교 그 외 기타 등등까지 합하면 무려 90% 이상의 국민이 크리스천.
교단의 가르침에 충실하야 이혼과 낙태가 법적으로 금지됨.
우리나라처럼 말로만 불법이 아니라 진짜로 금지.
걸렸다간 애 엄마, 애 아빠, 의사, 소개 시켜 준 사람 전다 구속되어 깜빵행.
외국인이라고 봐 주는거 없음.
필리핀 제2의 도시 세부의 경우, 한국 교민과 유학생, 관광객의 숫자가 특히 많음.
세부국제공항을 드나드는 사람은 한국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필리핀인. 중국인, 일본인 순.
이런 한국인들을 상대로 하는 한인 사업체도 졸 많음.
거리로 나가면 ‘대웅가든’, ‘코리아나식품’, ‘쏭쏭플러스노래방’ 과 같은
한국어 간판을 영어 알파벳 다음으로 많이 볼 수 있음.
세부에 이들 한인들의 자본이 유입되어 땅 값부터 시작해서 집 값, 인건비, 공산품등 물가 다 올려 놓음.
불과 수 년 전에 비해 무려 두 세배씩 땅 값이 뛰었다 함.
한국 자본으로 인해 경기가 호황을 맞고 세부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나아졌다기 보다는
그냥 경제에 버블이 끼고 한인과 접촉하는 일부 주민들이 돈 맛을 알게 됨.
옥빛 바다와 설탕가루 같은 금모래가 아름다운 세부섬에 본격적인 천민자본주의가 태동.
게다가, 두툼한 지갑을 무기 삼아 여자 건드려 놓고서는
나 몰라라 날라 버리는 한국인 유학생 및 관광객 다수 존재.
혼자 남은 필리핀 처녀는 꼼짝 없이 싱글맘 신세.
다시 한번, 필리핀에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낙태를 할 수 없음.
그리하여 필리핀의 두뇌들은 한국인을 곱게 보지 않음.
참다 못한 필리핀 집권층이 부패한 세부 경찰로 하여금
한국인한테는 조낸 해 먹는걸 허용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 지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부 시민들은 한국인에게 대체로 우호적이긴 함.
어쨌거나 저쨌거나 필리핀은 여전히 천혜의 자연이 살아 숨쉬는 끝내주는 관광지이고,
놀러 간 한국인은 돈을 잘 쓰니깐.
에피소드1. 목표는 생존.
막내이모는 짧은 추석 연휴동안, 팜플렛에 실린 그 호화요트를 무척이나 타 보고 싶어 했다.
나는 그런 이모에게 외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내기 위한 보디가드인 동시에 사진기사 겸, 짐꾼으로 채용 된 것이다.
철부지 이모 하나 잘 둔 덕에 남들 귀성 전쟁 하고 있을 시간에 수영하고,
요트타고, 스쿠버다이빙하고, 그러다 지친 몸은 전신마사지 받고.
즐길 수 있는건 종류별로 한 번 씩 다 해 보니 지상 낙원이 따로 없더라.
그리고 그 날 오후는 세부시내 중심가에 있는 백화점 아얄라몰에서 쇼핑을 즐긴 다음,
택시를 타고 특급호텔 마르코폴로로 가서 뷔페 저녁식사를 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쇼핑 잘 하시구요. 이따 6시 까지는 꼭 모이셔야 해요~"
하는 가이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화점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버렸다.
후텁지근한 열기와 매캐한 자동차의 매연이 나를 반겨줬다.
물론 이모를 따라다닌다면 리바이스 청바지나 라코스떼 티셔츠 두어벌 정도는 얻을 수 있었겠지만,
이번 패키지 투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허락된 단 몇시간짜리 황금 같은 자유시간인데,
몇 푼 하지도 않는 옷가지랑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젊은이의 여행은, 그래도 조금은 달라야 하니깐.
그리고는 오는 길에 슬쩍 봐두었던,
진짜 필리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판자촌으로 나섰다.
환장하겠다.
이렇게 우울한 분위기일 줄이야.
필리핀 요트 투어 같은건 나중에 나이 먹은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
그런데 데려갈 돈으로 나 평소에 가 보고 싶던 인도나 좀 가자고 출발 직전 까지도 이모에게 그렇게 보챘었건만.
굳이 지금까지와의 다른 삶들을 보기 위해서 인도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비행기 몇 번 타 본적 없는 우물 안 개구리의 눈에는 이런 세부의 뒷골목도 충분히 아비규환으로 보인다.
우리보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랑,
어수선하고 소외된 풍경을 사진 찍어 놓고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아가니 마니 하면서 폼 잡기에는 이 정도로도 부족함이 없다.
딴게 아니고 무섭다.
보통 어느 여행지를 설명할 때는 동화 속 풍경이라든지,
영화 속 풍경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여기도 꼭 무슨 영화세트장 같기는 하다.
7,80년대 홍콩영화에서 주인공이 여자를 구하러 가기 전에 중간 보스랑 싸울만한 배경으로 딱이다.
세계 최고수준의 치안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에서 곱게 살다 온 나는 이런 분위기가 무서워서 다리가 덜덜 떨린다.
내가 여기서 어떤 미친쟁이한테 칼침 맞고 끌려간다면 시신도 찾을 수 없으리라.
이모는 황소만한 몸을 이끌고 다니며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내 이름을 울부짖겠지.
이모의 성품과 완력을 감안한다면 그 과정에서 몇몇 무고한 세부 주민들의 유혈사태가 불가피하다.
우리 엄마는 그러게 걔를 왜 데리고 갔냐며 혼자 돌아온 이모의 허리를 반으로 접어 줄 거다.
그럼 안 되는데..
사진이고 나발이고, 일단 출발 지점부터 끝 지점까지 몇 블록 안 되는 주택가를 내 발로 살아서 걸어 나가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이왕 온 거, 일단 끝까지 가 보자.
아얄라몰로 돌아가든, 양아치들에게 험한 꼴을 당하든,
다음 일은 그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필리핀 여자 두 명이 내 옆을 스쳐 지나며 자기네끼리 수군댔다.
“울랄라 꿀랄라 코리안.”
“코리안 룰루랄루 꼴딸딸 꼴랄라.”
(어머 저기 봐. 한국인이야.)
(한국인이 이런 곳에 왜 왔데? 가서 여자들이나 데리고 놀지..)
세부 주민들의 방언인 시부안어를 이해 할 수야 없지만,
저 냉소적인 뉘앙스만큼은 분명히 눈치 챌 수가 있었다.
나를 쳐다보는 다른 시선들도 고와 보이지는 않았다.
그 이유야 뭐, 내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까닭일터.
아찔한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도심에서 신기료장수 영감네 넷째 딸이 시집도 못 간 채
애 엄마 된 이야기가 퍼지는 것도 금방일거다.
어물전 꼴뚜기 같은 놈들이 국가 이미지 다 배려 놓고 갔구나 싶다.
에라이 자랑스런 변강쇠의 나라야.
대한민국아.
나의 조국아.
제발.. 저들은 그냥 자기네 생활공간에 발을 들여 놓은 한국사람을 생소해 한 것일 뿐이며,
원래부터 좀 모난 성격에 야동을 많이 봐서 상상력이 삐딱해진 내가 혼자 오버한 것 이길.
'이런 곳에 왜 왔을까'하는 수백개의 시선들에 애써 의연한척 하며,
가까스로 골목길의 끝, 큰 길가로 걸어 나오는데 성공했다.
걱정했던 칼부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에피소드2. 친구 먹다
어떻게 저떻게 아얄라몰로 살아 돌아왔다.
1층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세수를 하다 말고 거울을 보니 잔뜩 상기 된 내 모습이 보인다.
한참 무더운 날씨에 땀에 절은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숨을 할딱대는 꼴을 보니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있긴 한가 보다.
다행한 일이야.
카메라를 확인해 보니 그 때까지 찍은 사진은 스무장이 채 되지 않는다.
필름 값 걱정 없는 디지털 카메라인데,
평소였다면 300장은 우습게 찍었을텐데.
숨을 좀 돌리자는 생각에 백화점을 돌아다녀 봤다.
서울의 여느 백화점처럼 아주 깨끗한 분위기에,
어디를 가든 에어컨 바람이 쌩쌩 뿜어져 나오고 사람들의 차림새도 다들 말쑥하다.
불과 100여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의 판자촌과는 어쩜 이렇게 대조적인 모습일까..
다 필요 없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나 줄줄 빨면서 옷 구경이나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이모의 쇼핑백을 들어주면서 생색 좀 내면 공짜로 얻어 먹을 수 있는게 얼마나 많은데,
저 바깥 동네가 무슨 전설속의 고대 유적지도 아니고 온 세상에 널리고 널린 평범한 판자촌일 뿐일 텐데.
여기서 나는 오지 탐험가가 아니라 그냥 가이드 따라온 패키지 투어 관광객이고,
이 푹푹 찌는 날씨에 사서 고생 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모를 찾아 다니며 백화점을 헤맨지 10분쯤?
손목에 찬 전자시계가 삐비빅 하고 울렸다.
나는 기계적으로 가방에서 선크림을 꺼내서 얼굴에 펴 바르기 시작했다.
“남자도 스물다섯이 넘으면 피부에 노화가 진행되니 너도 진작부터 관리 하지 않으면 나이 먹고 후회한다.”
라는 이모의 충고를 받아들여 두 시간에 한 번 꼴로 선크림 바를 시간을 맞춰 둔 것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웃고 나 자빠질 이야기지만
내게는 나름 엘리트 배낭족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엘리트 배낭족은 전쟁터와도 같은 여행지에서라도 요령 좋게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머니 주렁주렁 달린 카고 바지라던가 날짜와 요일이 표시되는 손목시계의 유용함을 익혔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와중에도 카메라에 물을 묻히지 않으며 사진을 찍는 방법을 배워왔다.
필리핀은 사하라 사막과 위도가 비슷한 곳이니깐.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자외선 차단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얼굴과 팔뚝은 물론, 귀 뒤와 목덜미 까지 꼼꼼하게 선크림을 펴 바르고 나니 난데 없이 근거 없는 자심감이 몰아쳤다.
나 자신이 참 멋있는 배낭족으로 느껴졌다.
'덤벼라 태양야 오빠는 SPF가 +39란다.'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아얄라몰의 육중한 지붕이 눈을 덮는다.
아 맞다 여기 실내지. 멍청하게도 실내에만 있을 거였으면서 선크림은 왜 발랐을까..
모름지기 낙타는 사막으로 가야지 숲 속에 있으면 안 된다.
얼굴 탈까봐 선크림 꼭꼭 챙겨바르면서 햇볕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잘 지어 올린 지붕 아래보다는.. 내리 쬐는 태양 아래가 내게는 더 잘 어울린다.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배낭족이니까.
엘리트 배낭족.
쫄지 말자.
여기는 국제적인 관광도시이고, 저 사람들, 저래뵈도 문명과 유리된 사람들도 아니고
한국 사람이랑 엄청 부대끼는 사람들이다.
죽지 않는다.
어딜 가나 카메라를 가장 반겨주는 것은 아이들이라지.
아이들은 천사니깐.
아무리 막장으로 치닫는 헐리우드 호러 영화에서도 아이들을 죽이는 장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한비야 누님이 여행지에서 어른들의 경계심를 풀기 위해 주로 사용한 수법도
애들을 꼬드겨서 함께 노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도 아이들을 잡으면 된다.
아주 쉽다. “헤이 코리안~ 테이커 픽쳐~ 픽쳐 포 미~”하는 말에 웃으며 사진을 찍어 주고,
LCD모니터에 뜬 영상을 보여주면 된다.
자기 사진을 본 적이 몇 번 없는 아이들은 화면을 보고 까르르 웃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주변의 어른들도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여행지에서 만난 인연들에게 즉석사진을 선물하기 위해서
출발 전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장 먼저 챙긴다는 여행자도 있던데,
그 동안 구닥다리라고 욕하기만 했던 300D의 조그마한 액정창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얼어붙어서 두리번거리던 한국인 녀석이 다시 나타나서는
애들을 무기 삼아 온갖 친한 척을 다 하고 있으니 이 곳의 어른들도 내가 퍽이나 신기한 모양이다.
다들 여기와서 사진 찍으라며 야단이다.
사람 눈에는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고,
조금만 생각을 바꾸고 나니 지저분하고 무섭게만 느껴지던 동네가 금새 정감 있고 활기찬 곳으로 바뀌어 보인다.
됐다. 현지 적응 성공했다.
이걸로 나는 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어디 가서 필리핀 사람들이 어쩌고 저쩌고 떠들 수 있을만한 자격이 생겼다…
라고 생각했었다.
에피소드 3. 김미 쏨 머니. 마이 프랜~
"저어 먼데서 찝차보이마 고마 쪼오차 가면서 고함만 빽빽 질러쌌지.
가들이랑 어데 말이 통하나?
할로오케이! 할로오케이! 캐사코 김미어쪼꼴렛! 김미어쪼꼴렛!
캐싸면 이 시키들이 조타 카면서 먹을거를 막 내 주는기라.
뭐 신기하다꼬 사진도 찍고 그 카데? 허허허허."
어렵던 시절, 동네 주한미군들로 부터 이런저런 구호품을 받아 먹곤 했다던 옛날 이야기는
소주 한잔 걸치고 들어오신 아버지의 메인 레퍼토리 중의 하나였다.
검둥이로부터 받았다는게 초컬릿이었다가.. 전투식량이었다가.. 껌이었다가 하면서 매번 바뀌지만,
결국에는 넌 식비 걱정 학비 걱정 안 해도 되는 행복한 아해이니 제발 공부 좀 열심히 하라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가만히 “예..예..”하면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쪽 귀로 흘러 넘기면서도,
아버지에게 초컬릿을 내 주며 사진을 찍어 갔을 검둥이 코쟁이 미군들만 떠올리면 까닭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단지 운이 좋아 부유한 나라에 태어났을 뿐이면서.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원하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를 동물원 원숭이 보듯 했었을 것 아닌가.
하기사 아무리 그래봐야 보릿고개를 모르는 나의 가치 판단일 뿐이다.
아껴 먹던 곡식이 다 떨어지면 들판의 쑥이나 소나무 껍질을 벗겨다가 밀가루 약간과 함께 쪄서
떡 같지도 않은 떡을 해 먹었다는 아버지에게 기껏
‘밥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잖아요.’라는 말을 꺼내지 않은 것으로 뿌듯함을 느끼는게 우리 세대다.
그런 나는 미군들의 전투식량과 껌과 초컬릿이 당신에게 얼마나 대단한 가치였을지 감히 판단 할 수 없다.
쉽게 쉽게 생각하자. 아버지랑 미군들이 죽이 잘 맞은거다.
주둔국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자기네가 쓰고 남는 물자를 나눠 주는건 선행이지 기분 나빠해야 할 일이 아니다.
여기도 마찬가지, 한국인 사업가들이 필리핀 현지인들 죽어라 부려먹고는
한달 월급으로 꼴랑 10만원을 준다고 혀를 차지만,
여기 사람들 평균 임금이 그 보다 훨씬 낮은데도 일자리가 없어서 난리인걸 생각하면
착취도 아니고 서로 궁합이 잘 맞는거다.
양자의 효용극대화.
유식한 경제학 용어로는 파레트 최적곡선.
하지만, 그렇지만, 조금 전 까지만 하더라도 카메라 앞에서 해맑게 웃음 짓던 아이가
작달만한 손을 내게 내밀며 뱉는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헤이 마이 프랜~ 김미 쏨 머니~ 아이 노 유 해버 라쯔 오브 머니.”
이 한마디를 시작으로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김미 텐 달라~ 오어 파이브!! 김미 저스트 원 달라~ 플리즈~ 마이프랜~"
"머니~ 머니~"
"플리즈~ 플리즈~ 마이 프랜~"
어지러웠다.
아이들 얼굴 사이에서 ‘할로 오케이. 김미어 ㅤㅉㅛㅤ꼴렛’을 외치고 있는 어린 아버지가 보였다.
저 아이의 눈망울에 비친 내 모습 또한,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검둥이 코쟁이 미군과 다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길 저쪽 편에서는 아이들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어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 아이들은 나중에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게 될까.
왜 나는 값비싼 해외관광을 거리낌 없이 즐기고 있고,
왜 이들은 내게 푼돈 1달러를 그렇게나 간절히 구걸하고 있는 걸까.
나도.. 나도 단지 운이 좋아서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것일 뿐이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입맛이 썼다.
나는 원래 망상을 잘 한다.
요즘 대통령 하는 짓을 보면 이 아이들의 자녀 세대쯤 되어서
우리나라와 필리핀의 경제력이 역전되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이 아이가 커서 지 딸내미한테
"아버지 어릴적에는 우리가 코리아보다도 못 사는 나라였다.
어느 코리안이 우리 동네까지 들어와서 사진 찍고 친한 척 하길래 1달러만 달라고 구걸 했던 적도 있었다.
그 새끼 아무리 졸라도 돈 안주더라.
그 때 존심 상해서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지금 니가 소 등심 먹고 있는거다.
그러니까 니도 공부 좀 열심히 해라 이놈 지지배야."라고 갈구는 모습이라거나,
그 딸이 우리나라로 여행 와서는 홀라당 늙어 버린 채
구부정한 허리로 길가에 앉아있는 내게 코웃음 치는 장면까지 순식간에 떠오른다.
기가 막힌다.
달러가 없으면 페소라도 달라고 따라 붙는 아이들을 뒤에 매달고 걸어 가고 있자니 주위 시선이 무척이나 따갑다.
아얄라몰의 사설경비원을 보고서야 아이들은 나를 놓아줬고,
나는 멍한 표정으로 1층 로비에서 주저 앉아 버렸다.
마르코폴로 호텔 뷔페로 저녁식사 하러 가서는 도통 먹으려 들지 않는 내게
이모는 얘가 혼자서 뭐 맛있는걸 먹고 왔냐고,
이게 얼마짜린지나 아냐고 짜증을 부렸고,
나는 덥길래 콜라 한 병 사 먹었더니 입맛이 없다고 대충 둘러대고는 가만히 자리를 떴다.
호텔에서 내려다 보이는 세부시내의 야경은 어둑어둑한 것이 하나도 아름답지 않았다.
‘마이프랜~ 머니~ 머니~ 저스트 원 달러~’하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 게시물은 간짜장님에 의해 2009-05-15 11:46:05 불펜 게시판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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