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놈들의 부러운 것 중 한가지 - 달변
- 작성일
- 13-08-29 10:56
제가 옛날에 다른 아이디로 쓴 글의 거의 재탕인데, 양놈들에게 부러운 것들이야 한 두 가지가 아니겠습니다만, 그 중 한가지가 바로 뻐꾸기 화술입니다.
말 잘하는 정치인들이야 하도 많으니 그렇다 치고, 운동선수, 학자(교수), 심지어 동네 아저씨들조차도 말빨이 굉장합니다.
우리나라는 오히려 달변을 하면 가볍다는 잘못된 인식까지도 가지고 있고, (제 생각에는) 어느 정도 말을 더듬는 것을 미덕(!?)으로까지 여기는 듯 한 반면, 미국은 말을 잘 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MLB의 경기 후 인터뷰와 KBO의 수훈선수 인터뷰를 비교해 본다면, 전자는 무슨 원고를 외우고 와서 읽는 듯, 술술 말을 잘 풀어가는 반면, 우리나라 선수들 인터뷰는 내용은 천편일률적이면서도 말도 버벅거리는 경우가 다반사죠.
뉴스 인터뷰를 봐도 대학교수든, 해당 분야의 전문가든, 일반인이든,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인터뷰이들은 뭔가 어색한 느낌입니다...약간 딱딱하고 굳은 표정에 톤도 비슷하고
반면 양놈들은 말빨도 좋고 감정표현에 적당한 제스쳐까지 섞어가면서 열심히도 떠듭니다.
이런 한국과 미국의 차이가 어디서 왔는지 따져본다면 저는 교육이 가장 큰 이유라고 봅니다.
한국은 (요즘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수업시간에 발표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아직은 낯설죠.
일방적인 교사(교수)의 주입식 교육과 받아쓰기, 그리고 정형화된 사고가 그것입니다.
미국의 N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지금은 K대로 옮긴 저와 친한 선배 말로는 미국 애들은 말도 안되는 오답을 가지고 와서 주구장창 떠들면서 의견을 개진하는 반면, 한국 학생들은 모두 획일적인 정답을 가지고 와서 조용히 앉아있다 간다고 하더군요 ㅋㅋㅋ
제가 미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건, 얘들은 비록 정답은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오답을 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직설적으로 지적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해결책이 정해져 있지만 brainstorming을 통해서 다른 대안을 모색하다가 더 좋은 답을 찾기도 하는 경우가 많지요.
처음에는 솔직히 미국인들의 이런 토론문화가 참 못마땅했습니다.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중구난방 떠들며 시간낭비를 한다는 인상이 강했죠.
하지만 이런 토론문화, 미팅문화에 익숙해 지면서 가끔은 기발한 발상을 통해 전혀 생각치 못했던 결론에 도달하고 성과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더불어, 모두 함께 모여서 내린 결론이기 때문에 수긍하기도 쉽고요.
한국식의 일방적인 까라면 까는 미팅문화, 즉 이미 윗선에서 결정된 사안을 아랫 사람들이 구색을 맞추기 위해 논리를 억지로 짜내는 문화, 와는 사뭇 다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던 회의가 바로 그런 것들이었습니다...윗대가리들이 결론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터무니없는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랫 사람들에게 증거를 만들고 (조작하고), 자료를 찾아내라고 하던 무의미한 짓거리들
약간 얘기가 옆으로 샜는데, 회의문화가 정착되고 수평적 위치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조리있게, 합리적으로 하는 습관을 길러가는 듯 합니다.
학생 때부터 이렇게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연습을 하고, 교사는 학생들의 주장을 묵살하거나 무조건 동조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토론을 유도하면서 생각이 자랍니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학생들)은 자기가 틀린 말을 해서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의 공격을 받지는 않을까, 망신을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앞서죠.
조금이라도 잘못된 주장을 하면 감정을 건드리면서까지 상대방을 깔아뭉개고 무시하는 공격성 짙은 토론 문화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더불어, 합리적 토론을 통해 생산성있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게 아니라, 기존에 가지고 있던 편견과 감정적 판단을 재확인하는 게 우리나라 토론의 현실에 가깝죠.
잘못된, 그러나 고치기 힘든 서열(나이) 문제 때문에 아랫 사람이 토론을 유도하면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듣는 것도 감수해야 합니다.
객관적 근거없이 아무 말이나 떠들어도 시청자들은 그게 자기 입맛(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에 맞으면 맞장구쳐주고 통쾌해 합니다.
토론을 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토론 패널을 응원하는 스포츠 중계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한국과 미국의 대선토론회를 비교하면 답답함을 넘어 참담함을 느낍니다.
서로 위트를 잃지 않으면서도 예리하게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는 두 사람의 대결, 그리고 감정을 자제하면서 객관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공격과 수비...
반면 한국의 대선 토론은 뜬구름잡는 소리에 자기에게 불리한 주제가 등장하면 횡설수설, 동문서답, 시청자들의 관심은 누가 '싸가지없는' 말투였는지, 토론의 내용은 토론 참가자들은 물론 국민들도 관심밖...어차피 토론회에서 하는 소리는 다 무의미한 헛소리라는 암묵적 동의
우리나라도 말을 잘 하는 사람을 키우는 문화로 바뀌어야 할텐데 갈 길이 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