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리가 전술탐구 (1)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전성시대
- 작성일
- 12-07-25 18:30
어느샌가부터 '후방 플레이메이커(Deep-lying Playmaker)'라는 용어가 축구계에서 흔하게 쓰이고 있다. 적어도 90년대 후반이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용어는 매우 생소했다. 그러나 AC 밀란의 안첼로티 감독이 안드레아 피를로를 이 포지션에 중용하고, 샤비 알론소를 비롯한 여러 선수들이 '제 2의 과르디올라' 혹은 '제 2의 레돈도'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그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사실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건 최근에 이르러서가 아니다. 90년대 들어 압박전술이 점차 정교화되고, 그로 인해 한 명의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클래식 플레이메이커 체제'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분담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라도나와 플라티니 등이 활약하던 80년대에는 한 명의 플레이메이커를 위해 나머지 선수들이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의 전술운용이 유행했다. 그러나 상대의 압박이 강해진만큼 탈압박의 중요성도 강조되기 시작한 현대축구에서는 더 이상 한 명의 에이스에게 너무 많은 걸 의존할 수가 없게 됐다.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은 선수가 상대 압박에 발이 묶여버리면, 팀 전체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점이 대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백 앞쪽의 미드필더가 1차적으로 볼을 전개하는 후방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담당하고, 공격형 미드필더는 보다 전방에서 찬스메이킹에 주력하는 '역할분담체제'가 최근 들어 크게 유행하는 추세다. 특히 4-4-2나 4-3-3처럼 공격형 미드필더를 두지 않는 시스템에선 일찍부터 이러한 분담체제를 적용시켜 왔다. 90년대 후반부터 셰도우 스트라이커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도, 플레이메이커형 윙어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이러한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중요성은 일찍부터 스페인과 네덜란드에서 가장 먼저 강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잘 알려진 대로, '탈압박축구'를 '압박축구'에 대한 해답으로 들고 나왔던 요한 크라이프는 아약스 시절 프랑크 레이카르트에게 이 역할을 맡겼고, 바르셀로나에선 펩 과르디올라를 이 포지션에 중용했다. 그 영향을 받아 스페인에선 일찍부터 후방 플레이메이커 유형의 미드필더들이 전방 플레이메이커에 해당하는 '메디아푼타(공격형 MF)'들과 함께 4-2-3-1 전술의 한 축을 담당해 왔다.
이탈리아에서 보다 일찍부터 '레지스타'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이는 선수비 후역습에 기반을 둔 카테나치오 전술로 인해 수비수들 바로 앞의 미드필더가 역습의 시발점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도 '탈압박'을 기준으로 이 포지션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건 90년대 이후부터인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현대축구에서 후방 플레이메이커를 강조하는 흐름은 과르디올라와 레돈도 등이 활약하던 90년대 스페인 라 리가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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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 EPL 상위권 팀들의 공통된 문제점이 확실한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부재'였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 문제는 EPL 팀들의 챔피언스리그나 유로파리그 부진에 작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맨유는 전반기 내내 이 문제로 고난을 겪어야 했는데, 심지어 웨인 루니가 4-4-2의 중앙 미드필더 위치로 내려와 후방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했을 정도였다. 고심 끝에 퍼거슨 감독은 폴 스콜스를 다시 현역으로 복귀시켰고, 후반기엔 마이클 캐릭의 컨디션이 살아나면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나갈 수 있었다. 다음 시즌에는 탐 클레벌리가 부상에서 돌아와 전력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만큼, 이제 맨유는 강력한 수비형 미드필더 혹은 뛰어난 장악력을 갖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영입이 좀 더 시급해 보인다.
보아스 감독의 첼시 또한 후방 플레이메이커 부재로 어려움을 겪었던 팀이다. 첼시에서 볼을 소유하는 스타일의 패스축구를 현실로 구현하려 했던 보아스 감독이었지만, 창조적 미드필드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그 목표는 실행으로 옮겨질 수 없었다. 특히 포백 앞쪽에서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수행해야 할 미켈의 전반기 부진은 보아스 감독에게 치명타로 다가왔다. 상대 팀은 이 약점을 간파하여 강력한 전방압박을 통해 미켈을 괴롭혔고, 리버풀을 비롯한 몇몇 팀들이 이러한 전술로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승리까지 가져가는 쾌거를 누릴 수 있었다.
리버풀 역시도 제라드의 계속되는 부상으로 인해 마찬가지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리버풀은 샤비 알론소 이적 이후 이 부분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특히 지난 시즌에는 미드필드 후방에서의 볼 소유가 거의 이뤄지지 못하면서 공수 간격이 자꾸 벌어지고, 선수들이 불필요하게 많이 뛰게 되는 심각한 수준의 문제점들이 노출됐다. 어느덧 노장 반열로 접어든 제라드가 좀 더 아래 쪽으로 내려와 후방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전담하여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퀼라니가 팀에 남아 로테이션으로 그 역할을 병행해 준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반면 맨시티는 다비드 실바의 미드필드 모든 지역을 누비고 다니는 전천 후 활약, 배리와 투레의 안정된 1차 볼배급에 힘입어 보다 완성도 높은 경기력을 구현해낼 수 있었다. 나스리가 좀 더 분발하여 실바의 부담을 덜어준다면 미드필드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듯하다. 아스날 역시도 아르테타가 후방 플레이메이커로서 팀의 균형을 잡아준 것이 어떻게든 챔스 진출권을 따내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됐고, 토트넘의 경우 반 더 바르트와 모드리치가 전후방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분담하면서 시즌 중후반까지는 좋은 경기내용을 선보일 수 있었다.
이처럼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중요성은 비단 라 리가 뿐 아니라, 현대축구 전반에 걸쳐 점차 강조되고 있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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