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칼럼 051] 고전 읽기 잡론(雜論) - 범부 김정설의 ‘오증론(五證論)’을 생각하며
- 작성일
- 12-06-28 00:23
'손잡이’ 없는 ‘문(門)’을 찾아
‘고전(古典)’을 읽을 때면, 마음이 편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번역된 책이라고 해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사전 지식 없이,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순진하게 맨손으로 다가섰다간 문전박대를 감내해야만 한다.
<자왈, 조문도, 석사가의.(子曰, 朝聞道, 夕死可矣.)>(『論語』「里仁」): “공자가 말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얼핏 보면 다 아는 듯하다. 그러나 한번 물어보자. ‘도’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왜 ‘죽어도 좋다’는 말을 했는가? ‘도를 듣는다’는 것은 누구에게 듣는다는 것인가? 속 시원한 답이 없다.
<자왈, … 지자락, 인자수.(子曰, … 知者樂, 仁者壽.)>(『論語』「雍也」): “공자가 말했다. … 아는 자는 즐거워하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 왜? ‘어진 자는 장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눈에 쉽게 읽히는 일상어이지만, 캐묻고 있으면 무언가 낯설고 답답해진다. 곰곰이 되물어보면, 말문이 막히기 일쑤다. 그냥 저만치 멀어져가기만 하는 언어들, 그 차가운 담벼락들. 글이 숨긴 하나의 내밀한 세계 속으로 ‘문(門)’을 열고 들어서려니, 그곳을 가리키는 표지판도, 그것을 열 ‘손잡이’도 없다.
이처럼 친절한 가이드도, 제대로 된 손잡이도 없이 우리는 고전에 마주 선다. 거기서 무언가를 알아내고, 찾으려 한다. 번역서를 보지만, 어디 그리 속 시원한 대답이 있던가? 이 책은 이렇고 저 책은 저렇다. 모두 다 한 소리씩 하고 있는 것 같으나 소리의 높낮이와 느낌이 다르다.
문자(文字)는 문화・지식 정보를 껴안은 타임캡슐 아닌가? 상갓집 개[喪家狗] 같이, 맥락을 잃고 떠도는 것처럼 보이는 고전 속의 수많은 문자들. 거기엔 이미 아득히 사라져버린, 그래서 ‘멀어진 시간의 이력[永]’, 이미 달라져버린, 그래서 ‘완연히 뒤바뀐 공간의 흔적[遠]’을 딱 봉하고, 시치미를 뚝 뗀다. 입을 싹 닦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우두커니 서 있는 문자에 눈을 들이대는 독자들.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오르려는 산악인처럼, 얼음산(고전)을 조심스레 긁으며 미끄럼을 막으려 침 박힌 등산화를 끌어올리며 날카롭게 빙벽을 찍어대지만(읽기), 연신 쭈-욱 쭉 미끄러져 내리고 만다.
퇴계 이황은 어린 선조에게『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리는 글 첫머리에서,「도무형상(道無形象), 천무언어(天無言語)」라 했다. 도에는 그것을 열고 들어갈 손잡이가 붙어 있지 않고, 하늘에는 그것을 찾아나서는 자를 안내할 어떤 표지판도 가이드도 없다! 이렇게 퇴계는 선조에게 ‘일부러’ 못을 박고서『성학십도』의 의미구조에 주의 집중하도록 한다. ‘도(道)’도 ‘천(天)’도 이치[理]도 이미 우리 눈앞에 훤히 드러나[發], 바로 발밑에 당도해 있다[自到]. 그것은 언제나 푸르른[常靑] 현전(現前)의 존재와 진실이다. 그것을 퇴계는 제대로 알아차리라고 닦달한다. ‘고인이 예던 길’이 ‘눈앞에 있거늘!’ 또렷이 깨어있는 정신 상태, 즉 ‘경(敬)’의 상태로 살아가라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고전을 접하는 태도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눈앞에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다. 운전을 해본 사람은 안다. 눈을 훤히 뜨고도 간판을 지나친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애정’과 ‘거리’ 사이에서의 헷갈림
‘고전’이란 참 버겁고, 불편한 물건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책을 “우리 안의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강력한 힘의 원천을 책에서 구했다. 한편, 헤르만 헤세는 “이 세상의 어떠한 책도, 너에게 행복을 베풀지 않는다. 그러나 살며시 너를 네 자신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고 했다. 책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안내자라 하였다. 이렇듯 고전은 ‘강한’ 그러나 ‘약한’ 물건인 것이다.
고전을 나와 일정한 ‘거리(간격)’를 두고, 냉정하게 대상화시켜서 객관적으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애정(신념)’을 갖고 따뜻한 시선으로 내 속의 심정적 감응(感應) 판을 작동해, 내 삶의 구조와 ‘일치=동일시=공명(共鳴)’시키면서 읽을 것인가? 전자는 객관적, 이성적, 학술적, 과학적 읽기이며, 후자는 호교론적, 감성적, 실존적, 주체적 읽기이다. 아직 우리 학계에선 어느 쪽이 타당한 방법인지 일치된 견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아니, 그럴 필요도, 그럴 방법도 없다.
‘공자왈(孔子曰)’을, 우리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공자가 말씀하시길’, ‘공자가 말하길’ 어느 쪽이나 거의 무자각적으로 읽고 있다. 인간을 우주의 표준으로 삼는 유가 쪽에서는 성현 앞에서 존경심을 표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같은 식의 극존칭이나 존대어를 자연스레 붙이고 만다.
그러나 ‘자연’을 우주의 표준으로 삼는 도가 쪽에서 보면 다르다. ‘노자왈(老子曰)’, ‘장자왈(莊子曰)’ 하는 식의 표현이 사용되지 않는다. 사람이 아니라 ‘자연(自然)’이 표준이니 그렇다. 자연은 ‘불언지교(不言之敎)’ 아닌가. 그래서 (누군가가) ‘왈’ 하는 어법이 사라진다. ‘사람’의 ‘말’이 사라진 자리를 ‘자연’이 차지한다. 자연은 몸을 뒤로 빼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에 ‘자연왈(自然曰)’이라 표현하지 않는다. ‘자연’의 ‘자(自)’는 ‘스스로’ 혹은 ‘저절로’이고, ‘연(然)’은 ‘그러하다’고 읽는다. 자연에서는 ‘누군가가 카더라!’가 아니라 ‘스스로-저절로’ 그러할 뿐이다. 스스로 피고 지는 꽃, 절로 절로 흐르는 물결, 스스로 푸른 산천, 절로 절로 시드는 나뭇잎과 같은 것이 ‘말없이’ 사람을 ‘가르친다’. 옛 어른들은 ‘세월이 사람을 가르친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참 멋진 말이다.
절로 절로 그러한 것들이사람을 가르친다는 사실, 그것을 알아차리는(見, 覺, 聞, 聽) 능력이 있는 사람들. 그들이 성현 아닌가? 그럼, 우리는 왜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가? 나약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에 기대고, 자연에 기대고, 하늘에 기댄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전하는 말씀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전해주는 사람에 기댄다. 그런 사람의 말씀을 담은 고전, 그곳이 사람들이 기대고 비빌 언덕이다.
진정한, 본질적인 것[宗]은 누구나 바로 알아챌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킬 손가락과 전해줄 테크닉이 필요하다. 가르침[敎]이 그것이다. 가르침을 베푼 사람들은 진정한 것에 ‘귀[耳]’가 열리거나 ‘눈을 뜬 자[覺者]’이다. 속인들은 그런 선지자의 입 열림, 손놀림, 몸놀림에 주목하며, 스스로의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바라보며, 자신 있게 제 발을 뻗어나가며, 사람다운 길을 걸었다. 고전은 바로 ‘사람임’, ‘사람다움’의 거울이자 본보기였다. 여기서 고전에 대한 ‘애정’과 ‘거리’ 사이에서의 헷갈림이 생겨나고, 우리는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 고민하고 만다.
고(古), 그 수많은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들
옛날 어른들과 그 어른들의 어른들. 그 수많은[十] 입을 통해 유전되는, 꼬리에 꼬리를 문 말들[口]. 나무 막대기를 들고, 범인(凡人)들의 닫힌 눈과 귀, 굳은 자세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사람들을 안내해왔다. 여기서 ‘보편’이란 지위를 얻어내고 이것이 삶의 지침(범례)이 되었다. 그래서, ‘옛말에 틀린 게 없다.’고 한다. 격언처럼 전해오는 한 마디 한 마디 말 속에는 다 그렇고 그런 ‘이유’를 한 짐씩 지고, 껴안고 있다. ‘옛 고(古)’자를 ‘까닭/이유 고(故)’자로 풀이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의 ‘말’은 사람들이 살아온, 찌질한 것이든 위대한 것이든, 온갖 ‘사연/사건’을 담고 있다. 고(古)자에는 그런 인간의 시간적 이력과 공간적 위치가 새겨져 있음을 은유한다. 그래서 ‘커다란/위대한 책[大冊]’을 모셨다는 ‘전(典)’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고’와 ‘전’이 단짝이 된 뒤, 그 ‘고전(古典)’이란 말은 다시 근대기 서양의 클래씩(classic)이란 말과 혼인을 한다. 말하자면, 국제결혼인 셈이다. ‘일급(일류)의’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의 클라시쿠스(classicus)는 원래는 그리스 로마의 모범적이면서도, 영원성을 지니는 서적을 지칭했지만, 차츰 예술작품까지 껴안는 폭이 넓은 개념이 되었다. 지금은, 고대뿐만이 아니라 근현대기의 훌륭한 저작, 작품까지 포괄한다.
아, 옛날이여! 이렇게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끊임없이 현재를 ‘짚어보는 것/자각하는 것’이며, 또한 현재를 ‘건강하게 부정하며 동시에 긍정하는 것’이라 하겠다.
고전 ‘이해’는 과거의 ‘용서’?
버드나무 가지가 물에 비치고, 황소개구리 울음이 수면에 파문을 만드는 고요한 아침. 나는 산책을 하고 나서, 얼마 전 읽다가 덮었던 책들을 다시 읽는다. 우선, 로저 샤툭의『금지된 지식』(조한욱옮김, 금호문화, 1998) 그 결론부에서,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춘다.
윌리엄 제임스가『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란 책 속에서 “사물에 대한 지식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라 했다.(259쪽)
는 인용문. ‘음 그렇지! 지식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지’하고 문단에서 눈을 떼는데 그만, 또 한 구절이 눈에 걸린다. 샤툭 왈,
같은 페이지의 여덟 줄 아래에서는 갑자기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해하는 것은 용서하는 것(모든 것을 아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각주에서 인용)’이라는 속담을 프랑스어로 인용하고 있다. 그가 마음속에 두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여기에서 제임스가 무심결에 이율배반의 다른 측면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다. 외적인 객관적 지식은 어떤 주관적 경험에 대한 충실한 파악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중략) 아무리 노력한다 하여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어떤 경험이나 어떤 삶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259-260쪽)
지식에 관심을 기울이면 자신의 경험과 삶의 내부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반대로 경험과 삶의 내부로 다가서면 지식은 멀어진다. 내 밖의 것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일이니, 받아들인다는 것은 용서하고 산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전을 이해하는 것은 과거를 현재적 맥락에서 용서한다는 것임을 알겠다. 사실 이해해버린 과거는 ‘과거’가 아니고 ‘현재’이다. 살아 있는 ‘지금, 여기’이다. ‘옛날’에 대한 살아있는 지금, 여기의 용서이다. 용서를 통해 과거는 현재적 지위를 얻는다. 고전은 이 점에서 항상 ‘이해/해석’이라는 작업을 통해 우리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와 ‘용서를 빌면서’, ‘새로운 의미’로 거듭난다.
범부 김정설의 오증론(五證論) : 융합적 시야에서 거듭나는 방법론
요즘 추세는 융합이다. 하나의 장르로만 설 수 없다. 고전 해석도 그렇다.『사서집주(四書集註)』는 주자(朱子)의 관점에서 재해석되고, 새로운 지적 질서와 풍경으로 구축된『사서』이며, ‘주자’라는 한 사람이 디자인해낸 당대의 문화, 정보, 지식의 총합체이다. 이것은 그가 만들어낸 하나의 그림이자 세계임과 동시에 그것은 기존의 다른 세계를 ‘밀어내고/부수고’ 있는 그림이었다. 따라서 주자의 해석만으로『사서』를 전부 읽었다고 할 수 없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사서』란 정보가 어느 한 개인의 지성으로 장악당할 수도 없다. 일리(一理)의 세계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렇듯이, 주자의 경학적 입장을 넘어,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의 읽기가 가능하다. 최근에 필자가 관심을 가진 사람. 소설가 김동리의 맏형 범부(凡父) 김정설(金鼎卨, 1897~1966. 일명 김기봉(金基鳳), 이하 범부). 나는 그의 ‘오증론’에 관심이 간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활용된 주자의 경학적 해석법과 다른 또 하나의 지평을 열어준다.
거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범부는 최근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경주가 낳은 사상가로, ‘천재적 인물’, ‘기인’ 등등 여러 가지 말로 수식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회상되고 있는 범부. 그는 고전 해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것이 오증론, 즉 다섯 가지의 논증론이다.
범부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후손으로 1897년 2월 18일 경주부 북부동에서 출생하여 4세부터 13세까지 김계사(金桂史)에게 한문과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을 수학하였다. 이후 많은 학술 및 사회 활동을 하였고, 1966년 12월 10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범부 김정설. ‘범부’는 호이고 ‘정설’은 이름이다. 범부란 호는 뭔가? 원래는 김정설 자신이 스스로를 낮추어 ‘그저 평범한 남자’라는 겸양어로 ‘범보(凡父)’라 호를 하였는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 ‘범보’를 ‘범부’라 부르다 보니 그만 그렇게 굳어버렸단다.
범부는 “언어란 소리로 들을 수 있는 생각이다.”라는 재미있는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고전의 이해는 그것을 쓴 사람의 생각을 조용히 듣는 일 아닌가? 범부는 우리 조선(한국) 특유의 전통문화, 특히 신라-경주, 풍류-화랑 문화의 사적(史蹟)을 연구하는 방법론으로, 독자적인 ‘오증론’을 제시한다.
한국문화의 독특성은 현재 문헌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문증(文證)’만으론 한계가 있음을 밝히고, ‘물증(物證)’, ‘구증(口證)’, ‘사증(事證)’, 그리고 추가적으로 또 하나의 다른 증명 방법, 즉 방증(傍證)으로서 ‘혈증(血證)’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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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의 |
1 |
문증(文證) |
문헌(文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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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물증(物證) |
고적(古蹟) | |
|
3 |
구증(口證) |
구비전설(口碑傳說)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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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사증(事證) |
유습ㆍ유풍ㆍ유속ㆍ풍속ㆍ습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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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혈증(血證) |
심정(心情)ㆍ혈맥(血脈) |
범부가 ‘혈증’론을 주장한 것은 그 자신을 포함한 우리 민족이 ‘풍류도(風流道)’ 등 한국적 문화의 혈맥을 직접 계승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한 발언처럼 보인다.
풍류도란 것은 어떤 교단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요, 어떤 명확한 경전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이 정신이 우리의 혈맥 가운데 흘러 왔을 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의미로는 우리 민족이 수난과 실패의 역사를 겪어 오면서도 오늘날까지 이만한 정신을 유지해 온 것은 풍류도 정신이 우리의 혈맥 가운데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범부, 「국민윤리특강(國民倫理特講)」, 『화랑외사(花郞外史)』 3판, 대구: 이문출판사, 1981, 232-233쪽)
“언어란 소리로 들을 수 있는 생각이다.”라 했던 범부. 그에 따르면, 우리 ‘혈맥’에 의거한 ‘혈증’은 지금 우리 몸속에 살아서 뛰는 ‘핏줄로 들을 수 있는 언어/생각’인 셈이다. 그는 말한다. “조선의 겨레는 물동이의 모성(母性)과 밥상의 부성(父性), 이 양친(兩親)의 자손(子孫)임에 틀림없다.” 이런 우리만이 가진 독특한 혈맥을 존중하고, 이것을 하나의 증거(혈증)로서 깊이 성찰해 간다면, 우리 고전의 독법에도 새로운 눈이 열리지 않을까? 분명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의 손짓, 몸짓, 눈빛, 입놀림, 입맛, 말투 등등은 따지고 보면 모두 우리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들 아닌가? 우리 핏줄 속에 면면이 흘러내려 오는 우리만의 유전적 증거를 염두에 두고 고전을 읽어간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낯선’ 독법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나아가서, 범부의 제안대로 고전을 ‘문증’, ‘물증’, ‘구증’, ‘사증’, ‘혈증’이란 ‘오증’의 융합적 시야에서 읽어간다면, 어떤 독법이 가능할까? 더욱더 호기심이 생겨난다.
이렇듯, 범부의 오증론은 고전을 ‘융합적 시야’에서 다시 읽어내는 한 방법으로 음미해볼 만하다. 그동안 책속에 묻혀왔던, 범부의 창의적 견해인 ‘오증론’을 문득 떠올려, 곱씹어본다.
글쓴이 : 최재목
영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서
『동아시아의 양명학』, 예문서원, 1996
『퇴계 심학과 왕양명』, 새문사, 2009
『시를 그리고 그림을 쓰다』, 열린시선, 2009
『東アジア陽明学の展開』, 동경 페리칸사, 2006
『東亞陽明學』, 북경 인민대학출판부, 2010
『東亞陽明學的展開』, 대만대학출판부,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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