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방학이다 보니 집에서 안보던 TV를 우연히 보게됩니다. 몇일 사이에 저를 놀라게 한 두 배우가 있습니다. 한명은 중견 연기자인 정애리씨고 다른 사람은 전지현씨입니다.



<루비 반지>인가하는 드라마에서 본 정애리는 제가 알고 있던 정애리가 아니었습니다. 한때, 정애리하면, 히트 제조기 김수현 사단의 드라마에도 출연해서 맛깔나는 연기를 보여준 배우였습니다. 최근 제가 본 드라마에서 정애리씨의 얼굴은 (아마 출생의 비밀을 친딸에게 알려주는 장면인 듯한데) 눈물을 흘리면서도 얼굴 근육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심한 안면 성형이 한 배우의 연기를 어떻게 망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보입니다. 위에 첨부된 사진을 보십시오. 저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이 고생을 한 여자의 모습으로 보입니까?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눈에서 눈물은 흐르는데 얼굴 근육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허다합니다. 특히 중견 여배우들의 경우에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원로 배우인 김수미씨는 <전원일기>의 유명한 연기파 배우였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할머니 분장으로 뛰어난 역할을 하던 이 배우가 정작 노년이 되어서는 주름을 감추기 위해 사용한 보톡스로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클로즈업 상태의 이 분의 연기를 보면 얼굴 근육이 역시 마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혹성탈출>의 원숭이 분장을 한 배우의 얼굴이 더 자연스런 동작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결국, 얼굴 근육이 안 움직이다 보니 이 분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전라도 사투리를 쓴 격한 욕설로 얼굴 연기의 공백을 메우는 것 뿐입니다.

40, 50년대에 팜므 파탈로 날렸던 미국의 여배우 로렌 바콜이 몇년 전에 이런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보톡스로 얼굴이 안 움직이는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는 것만큼 끔찍한게 없다" 



전지현의 경우는 이것과 다른 경우입니다. 그냥 화면에 이쁘게 보일려고 최선을 다 할 뿐 연기에는 도통 욕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억해 둘 것은 이 배우가 <4인용 식탁>에서는 매우 훌륭한 연기를 했던 배우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연기 스타일을 <엽기적인 그녀>의 스타일에 맞추는 것 같습니다. 방방 뜨다가 갑자기 째려보는 얼굴, 전지현 하면 이게 다입니다.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에서 전지현의 연기를 보다가 보고 있는 제 자신이 민망스러울 정도였습다. 전지현은 자신의 캐릭터에다 보톡스를 맞춘 케이스입니다. 이렇게 연기 폭이 정형화되면 다른 캐릭터로 돌아 올 수도 없고 지금하고 있는 연기도 엉망이 됩니다. 
한때, 성룡 영화에서 고함만 꽥꽥 지르던 여배우가 있었습니다. 톰보이 스타일의 이 여배우는 연기의 일대 변신을 꽤 합니다. 재키 챈의 여자가 아니라 진짜 연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그 여배우가 장만옥입니다. 40이 넘은 장만옥의 눈빛을 보십시오. 연기에 인생의 깊이가 묻어납니다.

프랑스의 영화 감독 장 뤽 고다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영화가 발명한 것은 클로즈업이다'. 영화의 문법을 발명한 D.W 그리피스는 여배우의 얼굴에서 시네마틱한 것을 찾아내었습니다. 이 말이 믿어자지 않는다면 (우리 나라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만들어진 그리피스의 <흩어진 꽃잎>을 한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무성영화인 이 영화에서 여배우 릴리언 기쉬의 얼굴은 영화라는 매체가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런 예를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윤기 감독의 <여자 정혜>는 영화 내내 카메라가 김지수의 얼굴에 바짝 붙어 있습니다.   
1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다가 선 카메라는 인물의 모공까지 다 드러내는 것이기에 여배우들에게는 기피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김지수는 모험을 감행했고, 정혜라는 여주인공의 미묘한 감정을 훌륭하게 스크린에 표현해냅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이 감독의 영화 중 유일하게 2.35대 1의 화면 비율로 찍은 영화입니다. TV 드라마의 여주인공 김혜자씨를 영화 스크린에 불러 내어 이 비율로 찍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한국 어머니의 정형을 다른 식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풍경을 찍는데 적합한 화면 비율로 김혜자씨의 얼굴을 찍었습니다. 아마 김혜자씨가 평범한 배우였다면 스크린에서 그녀의 얼굴은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의 사진에서 보듯 그녀는 광기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눈빛과 저 부르르 뜨는 주름을 보십시오. 이게 클로즈업이고 이것이 뛰어난 연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름이 없이 평평한 애니메이션의 얼굴과 다른 인간의 얼굴이며,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시네마틱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 두서없는 이야기는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두 배우의 최근 영화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변호인>에서 송강호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집으로 가는 길>에서 전도연의 얼굴을 보셨나요? 이 얼굴에 대해 어떤 글로서도 제가 본 것을 표현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법정에서 분노로 파르르 떨면서 또 한편으로 억장이 무너져서 허탈해 하는 송강호의 저 얼굴 근육들, 프랑스 세관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법정에서 한없이 작아진 전도연의 저 초췌한 모습들..

이것은 디지털과 3D 시대에 우리가 빼앗겨서는 안 될 진짜 시네마틱한 것들입니다. 제가 영화관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런 즐거움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