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 풍경
- 작성일
- 15-08-03 21:04
세가지 풍경......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습니다.
한달쯤전부터 설왕설래 그런 얘기들이 있었길래 그리 큰 반향도 없었구요.
대상자는 일곱명, 생산라인이 축소 되어 그 라인에 근무하던 인원이 권고사직 대상입니다.
포장을 담당하던 네명은 그리 어렵지 않게 사내 다른 하청이나 빈 자리로 자리 잡았고
문제는 3교대 근무를 하던 세명입니다.
포장직 네명은 모두 주간직이기 때문에 휴일 근무나 잔업, 야근이 별로 없어 한달 평급여가 대개 160- 170 정도이고
그 정도 급여수준이라면 어렵지 않게 자리를 찾을수 있습니다.
세명이 돌아가면서 하는 삼교대 인원은 최저시급을 받는다 해도 월평균 급여가 260 - 280 정도 되니
말단 생산직과 관련 직종에서 이런 수준의 급여를 받을수 있는 자리는 쉽게 나질 않습니다.
세사람 다 나이도 비슷비슷합니다.
다만 처한 상황은 세사람 각각입니다.
먼저 한 사람...
사십대 후반의 속편한 독신남. 숫자 계산 빠르고 잔머리 잘 굴리는 좀 맘 편한 , 결혼 생각 아직 없는 철부지.
사실 울산에서 말단 생산직이 실업급여를 받을수 있는 자격이 될만한 이직 상황에 맞닥트리는 일은 참 드뭅니다.
대개 실업급여는 대기업 직원들의 정리해고나 사무직의 대규모 감원, 회사의 폐업 같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하청 생산직은 별로 그럴 일을 당할 일이 없습니다.
급여에서 매달 꼬박꼬박 빠지는 이만원돈 되는 고용보험료를 드디어 그 혜택을 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앞서 권고사직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었을때부터 부지런히 검색해서 120일치 실업급여를 받을수 있다는것을 알았고
그 넉달간의 휴가 계획을 벌써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권고사직이 결정되자 제일 좋아합니다.
또 다른 한 사람...
두 아이의 아빠, 한 가정의 가장.
지금 회사가 사내 하청과 원청으로 갈리기 전부터, 그러니까 어쨋든 꽤 오래전부터 이 회사 이자리 저자리 옮겨다니면서
같은 회사 직원과 결혼을 했고 가정을 꾸렸고 두 아이를 낳았고 키웠고 벌써 큰애가 고등학생, 작은애가 중학생...
권고사직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었을때부터 사실 그건 말 뿐이고 그냥 사내 하청의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이고 우리가 원한다면
모든 고용 승계가 이뤄질것이며 그리 염려할만한 일이 아니라고 얘기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사내 다른 하청 기업에서 지금의 급여수준을 기대할수 있는 3교대 근무 자리를 찾을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
이 친구는 세사람중에 제일 젊습니다. 젊어봐야 두세살이지만 같이 교대 근무하는 다른 두사람에게 꼬박꼬박 형님이라 불러가며
참 성실하고 착실하게 사는 친굽니다.
노모를 모시며 살면서 그래도 결혼은 해야겠는지 권고사직 얘기가 나돌기전에 연차휴가 몽땅 긁어 쓰면서 베트남 갔다 오더니
베트남에서 신방 차리고 결혼했다고 합니다.
신부가 기본적인 귀화 자격만 얻으면 정식으로 한국으로 와서 부부가 되는것만 남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덜커덕 권고사직 통보를 받으니 제일 고민은 이 친굽니다.
신부가 귀국전에 신랑이 실직을 당하면 그 결혼은 파혼할수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리 되면 계약금조로 중계업체에 건네준 돈과 신부집에 준 결혼 지침금은 포기를 해야 하는것이겠지요.
사장과 몇시간 얼굴을 맞대고 상담을 하더니 답을 찾은 모양입니다.
- 우선은 급하니까 일단 아무 자리라도 들어가 있다가 차후에라도 좋은 자리가 나면 옮겨주겠다는것이지요.
.....
.....
그리고 세달이 좀 넘게 지났습니다.
제일 첫번째 사람은 계획대로 실업 급여를 받으면서 여유있는 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실업자 국비지원으로 중장비 학원에 다니면서 자격증 준비중입니다.
두번째 사람은 새로 옮긴 새 자리를 무척 힘들어 하고 못견디어 하더니만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어렵게 어렵게
적응해가고 있더군요.
사실 그 자리는 우리 몫이 아녔던겁니다.
앞전에 하던 사람들이 과중한 업무에 반발 비슷하게 그만 두면서 생긴 자리이기 때문에 그대로라면 근로여건이 많이 개선될 여지가
있었던 자리 였는데 어쨋든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서 이도저도 아니게 돼버렸습니다.
제일 안타까운건 베트남 신부와 결혼을 앞둔 친굽니다.
간단히 계산을 해봐도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몇일 여유를 두고 취직을 했다면 그 기간 나름대로 몇일 휴일을 즐길수 있었고
조기 취업수당이라는 일년뒤 한꺼번에 지급 되는 절반의 실업급여도 짭짤하게 챙길수 있었을텐데
급박한 이 친구의 사정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근무하기 가장 꺼려하는 현장(급여짜고 환경 안좋고 위험한)에 처박아 두었던겁니다.
결국 일주일만에 그 자릴 뛰쳐나와서 어렵게 어렵게 전혀 다른 직종에 취직이 되긴 했더군요.
첫번째 사람의 처세가 꼭 정답은 아닐겁니다.
하지만 좀만 여유를 가지고 머릴 썼다면 두번째 사람의 무모함과 세번째 사람의 어리석음은 충분한 재고의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또 당한대도 별로 바뀌는건 없을겁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은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살펴보기 전에 우선 차지 하려 할 것이고
급한 맘에 이것저것 재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현재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는 사려깊음을 갖지 못할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첫번째 놈이 접니다.
휴가 한달 좀 넘게 남았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