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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막바지는 의도치 않게 사람들을 만날 일이 연달아 생겼습니다. 그 중 공연하거나 무용한 만남은 전혀 없었지만. 그때부터 한 주일 남짓 술 마시고 영화 보는 일을 거의 하지 못한 탓인가. 나도 모르게 조급증이 몰려들고 신경질적이 되어.. 

잔뜩 가라앉다가 끓어오르는 기분을 돌려 보려고 평소 입에 대지 않던 초콜렛과 캔커피를 들이부었지만 나아지지 않던 기분이 포도주를 마시니까 조금씩 마음이 풀리는데. 포도주는 지성의 동반자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혼자 있을 때에는 거의 마시지 않았습니다. 일이 잘 안 될 때에는 포도주의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회사안에서 시도가 불가능하고.. 일이 어느 정도 된다 싶을 때에는 포도주가 아니라 캔커피 정도로 충분하다. 스스로를 포도주의 쾌락에서 차단하는 기묘한 피학증에 사로잡히곤 하고.. 일이 잘 안 풀릴 때에는 포도주의 도움을 받아보자는 생각조차 잘 안 난다는 점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고도 기분이 나아지거나 머릿속이 환해지지 않는다면? 편두통을 앓는 사람은 머릿속 한구석에서 섬광을 느낀다고도 하는데. 포도주에 젖어 들어가는 동안. 때로는 머리 주위에서 명멸하는 작은 불꽃들을 느낍니다. 그것은 소중하고 고귀하며 신비한 것이기도 하고 종종 뻔뻔하고 가증스럽고 무디고 미련한 것이기도 하지요. 거의 매일 밤. 이 격랑 속을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보냅니다. 무언가를 손에 붙들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놓은 채로. 

얼마 전. 비까지 뿌린 뒤. 가을 분위기는 사라지고. 겨울 기운이 감도는 것 같습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조용한 주점을 찾아다니며 온갖 술을 마시고 때론 카페에 앉아 가을의 공기를 가슴이 터지도록 들이마시려던 게 이번 가을의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는데. 술잔을 들 여력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버린 시간. 헐벗은 차림새로 찬바람을 맞으려니 착잡해진 심정. 며칠 전부터 마시던 포도주병들은 이제 비어버렸고. 한 잔을 더하려면 근처의 마트로 항해야 하는데. 하나는 4백 미터쯤 오르막을 걸어 올라가야 있고. 하나는 4백 미터쯤 내리막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어느 쪽이든 오르내려야 한다는 점에서는 결국 같군요,

코 앞에 들이닥친 겨울. 어렵고 긴 시간.

건강과 마음 추스릴 대비들 단단히 하십시요. 그 안에서 즐거움과 행운도 함께.

많은 날들은 그저 흐르거나 지나치게 되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