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동료의 은퇴.
- 작성일
- 11-09-20 06:41
원래 이분야가 많이 떠납니다. 세부 전공을 바꾸는 거는 물론이고 아예 박사과정 중에 또는 박사를 받은 이후에 전체 전공을 갈아버리고 다른 분야로 떠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봤습니다. 뭘 그런거같고 그러냐. 자기 전공 따라서 직업 선택하는 경우는 어느 일이나 적다라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좀 다른게 이 분야 박사과정을 밟는다는 것 자체가 꽤 큰 각오를 요구합니다. 한국에서 지도교수님 찾아가서 면담 때 첫 질문이자 마지막 질문이 "집에 돈은 좀 있냐? 잘사냐고~" 였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엄청 좋아하거나, 아예 인생을 포기했거나 둘 중 하나여야 이 일을 계속 하는 거 같더군요.
첫 경험은 하버드 대학원에 붙었던 친구가 어드미션 티켓을 쿨하게 포기하던 모습이었고, 한동안은 의학 대학원. 이제는 로스쿨로 많이 빠지더군요.
지난 한국방문 당시 만난 고교 동기 및 선배 4명 중엔 저 빼곤 전부 박사를 받고서도 진로를 바꾼 케이스. 그러나 저도 이제 그런 일에 더이상 놀라지는 않죠. 뭐 현실이 그러니까요.
그러나 오늘은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가기 전부터 같이 연구한 포닥이 있는데 유태인이고 정말 똑똑하게 느껴졌었습니다. 지도교수님이 노년이시다보니 최신 유행에 민감하지 않으셨죠. 그런 까닭에 포닥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웠고 지난 2년간 지도교수님과 이야기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시니컬한 태도때문에 자존심 상한 적도 많았지만 늘 그의 논리적이고 영리한 연구방식에 동의해야했죠. 그가 쓴 논문이나 연구노트 읽어봐도 진짜 명료합니다.
하여간 우여곡절끝에 무려 제가 한국에 갔을 때 얻은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서 논문을 publish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근데 포닥이 이번 주말에 이곳을 떠나죠. 포닥이 몇년 사이로 직장을 옮겨야 하는 신세인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던 터지만 좋은 코워커를 한 명 다른 곳으로 떠나보낸다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잘맞는 코워커를 찾는다라는 게 쉬운 건 아니거든요.
그래도 학회에 가거나 이 일을 계속 한다면 만날 날이 있겠지라고 말하는 순간, 아예 이쪽 연구에 손을 접는다라는 말을 들었네요. 저한테는 메시가 지금 은퇴하면 받을 축구팬의 것만큼이나 충격적입니다. 이 결정은 이미 진작에 내린 것이었던 것 같아요. 바로 오늘까지도 같이 연구했는데 이번 주말에 아예 접는다는 거죠. 타고난 학자라는 생각인데 최근 연구를 좀 등한시한다는 느낌 역시 받긴 했었습니다만 역시 프로다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여간 그렇게 똑똑한 박사놈이 그렇게 쿨하게 떠나버리면 여기 남아있는 여전히 학생인 나는 어쩌란 말인지. 창피하고 열받고 그러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