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안락한 하룻밤을 보장해 주었던 벽소령호텔.

7년 전 가장 최근에 지리산 왔을 때
(그 다음 해 어린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그 뒤로 등산을 해볼 기회 자체가 없었다)
부부의 등산화가 한꺼번에 망가져버리는 바람에 스포츠 샌들만 신고 저 길로 하산한 일이 있었다.
무지 긴 포장도로를 지겹게 따라내려가야 하는 길인데
운 좋게 1년에 딱 두 번 안테나 점검하러 오는 kt 직원 차를 히치하이킹하여 룰루랄라 내려갔던 기억이 ㅎㅎㅎ

어제 걸었던 거리는 대충 17km.
오늘 걸을 거리는 10km. 띵까띵까~



벽소령에서 출발하는 길은 이렇게 생겼다.

여전히 눈앞의 능선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벽소령을 떠나 첫번째 만나는 봉우리 덕평봉.
푯말을 새로 칠하면서 예전에 붙여두었던 봉우리 이름을 다시 달지 않았다.
여기 뿐 아니라 상당히 많은 봉우리에서.

이제 고작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뿐인데 벌써 샘터를 하나 만났다. 선비샘.
예전엔 선비샘의 유래를 설명한 안내문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안 보이네...

사진 속의 청소년은 목포에서 단체(60명!)로 수련회 차 등산을 하는 목포 출신 고등학생들.
어린 녀석들이 찐~하게 사투리를 쓰는 걸 보니 참으로 귀엽구마이~~

파다다닥. 벌써 절반 주파.



칠선봉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어야 하는데...



뿌옇게 뒤덮인 골짜기...

전방에 천왕봉이 머~얼리 보일.. 리가 없다-_-;;;

나름 요기 어린 분위기 연출.

가오가 있지, 땅바닥에 뒹구는 더러운 줄은 잡을 수 없다는 마나님.
결국 지팡이만으로 올라가는 데 성공하고 나서 V~~



세석평전에 도달하기 직전 넘어야 할 영신봉.
봉우리 도달 직전 잠시 아크로바틱하게 올라가야 하는 급경사구간이 있었는데...
죄다 계단으로 바뀌었다-_-;;;

10여 년 전에는 바위를 타고 올라갔어야 했는데...

꽃, 벌, 등에.

별유천지비인간도 좋지만,
좀 보여라-_-;;;

휴~ 이제 힘든 구간은 다 올라왔다.

좀 전에 여길 넘은 게지?
왼쪽에 웬 비행기냐-_-;;;

봉우리의 푯말이 정말 정상에 위치한 건 아니지 싶다.

1600m 고지대에 장엄하게 펼쳐진 세석평전.
역시 안 보인다-_-;;;;

앗, 이제 보인다. 순식간인 걸.
저~기 대피소도 보이고, 세석평전도 보이고, 촛대봉도 보인다.

다시 순식간에, 구름이 촛대봉을 딱! 반 쌈싸먹었다-_-;;

드디어 도착.



점심을 먹고 발을 쉬게 해 줄 겸 벗었더니 오래간만에 물집이 잡힌 게 눈에 띈다.

어디론가 돌격을 준비하고 있는 잠자리떼.



세석평전 또한 남북 어디로든 하산할 수 있는 길목.

세석대피소.
보통 대피소 관리인들은 등산객에 대한 대응이 퉁명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여기 관리하는 아저씨는 친절 그 자체.

잠자리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가녀린 나의 손.

이제 대충 먹고 대충 쉬었으니 출발하자.
남은 거리는 고작해야 4km 정도.

북쪽으로 빠지면 백무계곡. 남쪽으로 빠지면 거림.

고도 1600m를 넘기고 나니 식물들 키가 작아지면서 전망이 점점 트이기 시작한다.



세석대피소가 저~ 아래이건만 구름은 줄기차게 끼는구나...

세석평전을 끼고 있는 촛대봉 정상에서.

저 구름을 좀 치워보면 천왕봉이보이련만,
하여간 뭐 좀 찍어보려면 어김없이 구름이 끼어든다-_-;;;

그래도 이만하면 양호.
전방에 이제 넘으러 갈 두 봉우리가 보인다.


세석평전에서 20여 분만 오르면 되는 가까운 거리이지만 그래도 눈요기를 할 만한 포인트라 할 수 있다.



가자~~~

누가 가져다놓은 바위인지. 혼자 맨돌맨돌~

이름을 잊어버린 봉우리를 넘다-_-;;

아, 좀 보이라고-_-;;;

오전에 넘어온 봉우리도 보일똥 말똥...

장터목 대피소에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연하봉.
그 직전에 나타나는 예쁜 풀밭.

줌을 이~빠이 땡겨서 찍은 건데 뭘 찍으려고 그랬던 것인고-_-;;;

드디어 연하봉.
사실 이 봉우리를 넘는 건 그리 힘든 일은 아니지만 나름의 트라우마가 있던 장소이다.

지리산에 처음 왔을 때, 끔찍하게 힘들었던 기억의 하일라이트라 할 수 있는 봉우리이기 때문.

당시 일행의 수는 남 다섯에 여 여섯. 남자들만 죽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는데,
게다가 총 11명의 일행 중 전원이 지리산 초행, 8명은 등산 자체가 처음이었던 것이다-_-;;;

얼마나 거지 꼴을 하고 다녔을 지는 안 봐도 블루레이. 

대부분의 여자(후배)들이 충분히 퍼진 상태라서 짐을 가볍게 해주고 장터목으로 먼저 보낸 후
모든 걸 떠멘 남자 둘이 터덜터덜 손에 랜턴 하나 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뚫고 넘었던 기억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 초코파이를 먹고 급체를 하여 정신줄이 오락가락하는 (모르는) 남자 하나를 붙잡고
사지를 옷핀으로 찔러대며 온몸을 주물러주던 일까지.
정신줄이 반쯤 나간 맨 마지막 일행 둘이 장터목에 도착한 건 대충 오후 아홉시.

문제는 이 두 명이 텐트를 지고 있었기에 선발대가 숙영지 설치를 못했으며,
이 두 명이 버너를 가지고 있어서 저녁 준비도 못했으며,
이 두 명만이 랜턴을 가지고 있어서, 여자 여섯 명이 계곡으로 세수를 하러 가지도 못했다는 거-_-;;

결국 두 명이 도착하자마자 남자 다섯 명은 텐트를 치고 밥을 하고 등등을 하는 동안
여자 여섯 명은 계곡에 가서 피부 관리를 하고 오셨다.....


뭐 그랬다는 이야기.

영신봉을 지나다 보면 눈에 띄는 나름 멋진 바위.

엄연히 등산로가 아니건만 많은 이들이 저기를 오르다가 장렬히 산화하셨는지,
이제는 줄까지 마련해 주셨다. 어차피 못 막는 거 다치게나 하지 말자는 친절한 배려.



제석봉에 가면 실컷 보겠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고사목이라서 한 방.



드디어 도착한 장터목 대피소. 휴가의 마지막 밤을 보내야 할 장소.

문제는,

예약을 못했다는 거-_-;;

보통 국립공원 대피소 예약은 15일 전 오전 10시에 시작하는데,
10시 3초에 1등이 예약을 마치고, 10시 7초 쯤에는 모든 예약이 끝난다.
마침 이 때는 휴가의 피크라서 예약 취소도 거의 없었기에 추가 예약은 꿈도 못 꿨다.
천왕봉 일출을 노리는 등산객이 많기 때문이리라.

거기에 아까 마주쳤던 목포 고딩이들 60명이 광클로 여기 예약을 해버렸기에-_-;;;

그래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우리 부부가 하루를 보내게 될 보금자리.
나름 잘 골랐다.
왼쪽에는 계단이 있어서 바람을 막아줄 거고,
오른쪽 트인 부분은 난간에 각종 빨래를 널어서 바람을 막는다는 전략을 세웠다.
 
마나님, 이런 거 찾아내는 눈은 역시 탁월하신 분.

저녁도 다 해먹었는데 해가 떨어지려면 아직 멀었다.
저긴 조금 전에 넘어온 능선은 아니지 싶은데...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남달리 추위에 약한 마나님이 걱정되어
혹시 대피소를 이용하지 못해도 모포를 빌려올 수 있는지 사무실에 물어봤다.
단호하게 말한다. "안됩니다."
"그러면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떡해야 하는 거죠?"
"예약 안 하고 오실 분들은 다 그만한 준비는 하고 오셔야 하는 겁니다."
".................."


그래서,
이렇게 눕고 말았다ㅠㅠ

셀카를 한 방 찍어보려는데 각도 맞추기가 어렵다-_-;;;

비닐이라도 어디서 얻을 수 있으면 좀 낫겠구만.

뭐, 큰비가 내리지만 않는다면 요즘 침낭은 방수 잘 될 테니까
저 우산으로 대충 얼굴만 가리면 자다가 얼굴에 비를 맞는 사태야 피할 수 있다.
마침 지나가던 아저씨 한 분이 자기는 숙소를 예약했으니 이걸 쓰라면서 자기 우산을 하나 건네주셨다.
우산 두 개로 얼굴을 가리니 바람도 많이 막고 한결 낫긴 하다.

이제 완전히 깜깜해졌다.
저기 달님도 보이는군.

그래도 비를 대비하여 어디서 비닐이라도 얻어야 하지 않나 잠시 생각했지만,
어차피 비가 쏟아지면 만사 다 때려치고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가자 생각하고 잠을 청했다.

어, 춥다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