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방에서
- 작성일
- 12-03-26 08:39
일상적인 주말의 어느 한적한 골목길 구석에
샷시 문을 달고 있는 조그마한 책방.
입간판이 나와 있지 않았더라면, 그 곳이 만화방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먼 발치에서 보았을 때는 간판부터가 너무나 생기 없고 낡아 보여서,
문 닫은 가게는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샷시 문은 다행히 잠겨있지 않았다.
만화 하면 이제는 종이에 출판된 것보다 웹툰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요즘 세상에
이런 구멍가게 규모의 만화방이 문 닫는 것은 어찌보면 그 쪽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남자와 여자는 다정히 손을 잡은 채,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들을 반긴 건, 만화방 주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연령대는 쉽사리 추측되지 않지만, 대략 상당한 연세라고 추정되는 할아버지 한 분이었다.
남자가 굳이 만화방 얘기를 꺼냈었던 것은,
그저 옛 생각이 났기 때문.
그리고 저번 주에 간만에 만난 친구와 오랜만에 들렀던 만화방에서
보던 시리즈를 미처 다 못보고 나온 아쉬움 정도였다.
또한, 나란히 앉아서 서로 어깨를 기대며 손 부여잡고
주전부리라도 함께 나누며 오붓하게 편한 시간 보내는 그런 그림도 상상했었더랬다.
그러나
책장으로 이미 빼곡한 이 가게의 남은 공간이라고는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만한 통로들 뿐, 그러한 오붓한 공간은 창출해내기 어려워 보였다.
남자와 여자는 만화책을 빌려가기로 한다.
여자가 묻는다.
"할아버지, 저희가 원하는 책이 있는데 혹시 찾아주실 수 있나요?"
"아니~ 내가 어떻게 찾어, 못찾어. 아가씨가 직접 찾아봐~"
당연한 대답이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던 거지 젊은 사람들도 단골이 아니라면 만화방에서 책 찾는 데 헤맬 수 밖에 없는데
그 연세에 이 복잡한 책장의 미로 할아버지가 누빌 수 있다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좁은 공간 때문인지, 책장은 무려 3단 구조다.
평소에 익숙했던 만화방 풍경과 너무나도 다른 이 가게의 모습은 흡사 헌책방의 모습과 같아서
여자가 할아버지에게 재차 묻는다.
"할아버지, 여기 책들 빌려주는 게 아니라 파시는 거에요?"
"아니야~ 빌려주는 거야."
"가격이 어떻게 해요"
"뒤에 책 가격을 봐봐. 4천4백원 짜리는 400원, 3천2백원 짜리는 300원"
뭔가 안 어울리게 합리적인 가격 정책이다.
책 가격의 10분의 일 십원단위 절사.
보통의 만화방은 양장본 소장본 등만 비싸게 받는 거 같고, 나머지는 가격 통일이었던 듯하다.
손님이 반가웠던지 한 번 터진 할아버지의 말문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나는 그냥 가게 봐 달라그래서 소일거리 삼아 있는 거지, 가게에 대해 잘 몰라~"
"전에 위층 살던 아주머니가 집이랑 아래 이 가게랑 다 팔고 나간 것을
고스란히 받아서 하는 거야. 우리 딸이 산 건데, 나보고 하루에 몇 시간만 와서
가게 봐 달라고 해서 여기 있는 거야."
여자가 아는 척을 한다.
"머리 치렁치렁 하던 그 아주머니요? 저 예전에는 여기 많이 왔었어요.
와본지 한 5년 넘은 거 같아요."
이 곳은 나름 여자의 추억의 장소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만화책은 대략적으로 비슷한 카테고리의 작품들이 모여있긴 했지만,
일단은 정렬이 되지 않은 모양새였다.
장르별로 작가별로 어정쩡하게 모여 있을 뿐, 가나다 순의 배열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듯 했다.
남자가 책장의 미로를 두어 번 돌아봤지만, 찾을 수 있을 거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작은 규모의 가게라면, 찾고 있던 책이 없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듯했다.
보던 만화책은 남자 집 근처의 남자에게 익숙한 만화방에서 보면 되지,
여기서 굳이 그 책에 목매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었다.
메인은 만화책이 아니었으니까.
그리하여 대충 눈에 들어오는 것을 고른 것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원작인 '올드보이' 였다.
남자는 영화를 인상깊게 보았던 터라 일본 만화 원작이 궁금하기도 했고,
또 올드보이의 그 묘한 그로테스크적인 분위기가 이 가게랑 무언가 어울려 보이기도 했다.
여자가 고른 것은 여덟 권 남짓의 순정만화 시리즈.
일본 만화였지만 평범한 회사 여사원과 실장님과의 로맨스를 그린
(실장님이 재벌가 2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평범한 한국 드라마같은 만화였다.
계산대에서,
이 곳의 분위기 답게도 할아버지는 책 일련번호랑 이름 연락처를 메모 남기고 가라고 한다.
컴퓨터가 있긴 한 거 같았는데 데이터베이스화 되어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세상에나.
리얼 아날로그다.
"나는 컴퓨터 쓸 줄도 모르고, 손가락이 이래서 타자도 못 쳐~ 거기 적고 가~~"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의 오른 엄지 손가락이 없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잘 모르셔서 그렇지, 오른 엄지 손가락은 타자 치는 데는 별 영향이 없다.
바코드로 찍으면 10초면 끝날 작업이 일일이 적으려니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계산조차 할아버지는 젊은 남녀에게 맡긴다.
계산기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올드보이'는 권당 300원, 순정만화는 400원이다.
"얼마야~ 거기 계산해봐~~"
'올드보이'는 4권, 순정만화는 8권, 남자의 만화보는 속도가 느려서 딱 절반의 양을 집어왔다.
4*300 = 1200원 + 8*400 = 3200원 합이 4400원이다.
남자는 머릿속으로 간단한 산수를 했지만, 계산기에 길들여진 그는 결과에 자신이 없었다.
검산을 두어 번 반복했지만, 사실 검산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계산이었다.
할아버지가 넣어가라며 주섬주섬 쇼핑백을 챙겨주시며 묻는다.
"근데 계산을 같이 하네. 둘이 같이 사는 거야?"
당황한 남자가 말한다.
"아....아닙니다;;"
- 끝 -
** 예전 북풍님 생각이 나서 흉내를 좀. 엠팍에는 아직 글 쓰시는 것 같던데
그 분 글 팬이었는데 말입니다.
이런 건 짧게 써야 맛이 사는데 주저리 주저리 길어졌네요.
사람 자체가 좀 수다스러워졌음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