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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민 감독의 <최종병기 활>은 내러티브가 빈약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병자호란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빌려올 때 감독은 딜레마에 빠졌을 겁니다. 역사적 상황을 어느 선까지 설명할 것인가라는 것이죠.

김한민 감독은 도입부에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이 물러가고 중립외교에서 친명배금 정책으로 외교노선이 바뀌었음을 조금 설명하고, 영화 중반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에서 버티다가 굴욕적인 패배를 했음을 설명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 사이 모든 내용은 남이(박해일)와 서군(김무열)이 자인(문채원)을 청나라 군사들로부터 구하기 위해 도망가고 추격하는 씬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쫓고 쫓기는 씬을 위해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은 다 쳐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엄청난 속도감을 가지고 전개됩니다. 마치 컴퓨터 게임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줍니다(어떻게 보면 역사적 배경을 자막으로 설명하는 것도 게임적 요소가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아주 흥미있게 봤습니다. <최종병기 활>에서 불균질한 두 가지 층위가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첫 번째 층위는 이 영화에 여성을 대상화시키고 대상화된 그 여성의 순결을 지키주기 위한 가부장적 층위입니다.
남이가 아버지에게 받은 유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인을 지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여동생을 지킵니다. 그러다 김무선 대감(이경영)의 아들 서군이 평소에 자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어 남이에게 허락을 받아냅니다. 이 과정에서 자인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습니다. 서군이 초대한 술집에서 남이가 여동생 자인을 두고 내기를 겁니다. 서군이 남이를 칼로 베면 자인을 시집보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이 서군을 베겠다는 것입니다. 두 남자가 당사자인 자인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싸움부터 하는 것입니다.

결국, 김무선 대감의 허락으로 자인과 서군은 혼례를 치룹니다. 이때 카메라는 이상하게도 자인의 시점 숏이 남발 됩니다. 보통 시점 숏이라면 보는 주체가 주체성을 띄게 되는데 여기에서 정반대의 양상을 보입니다. 자인의 시점 숏은 특이하게도 오빠인 남이와 남편이 될 서군을 번갈아 봅니다. 그것은 마치 남이의 테두리에서 서군의 품안으로 옮겨길 것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그녀는 남자들 사이에서 전달되는 물품일 뿐입니다)

하필 혼례를 치루는 날에 병자호란으로 청군이 침입합니다. 이건 무얼 말하는 걸까요? 서군과 자인이 첫날 밤(섹스)도 못 치룬 상태에서 청군에게 잡혀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청군 병사들은 올가미를 던져서 여자들을 끌고 갑니다. 약탈의 모습을 더 강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자인의 위치에서 보면 자인은 남자들 사이의 교환 대상입니다.

영화에서는 크게 세 번의 교환이 있습니다.

아버지 ---- 자인  ----  남이

남이  ---- 자인 ----- 서군

서군 ----- 자인 ----- 청군

첫날 밤을 치루지 못했지만 남편인 서군은 (첫날 밤을 치루고자) 영화 끝까지 신랑복을 벗지도 않고 청군에게 끌려간 자인을 추적합니다.

청군의 왕자가 자인을 범하려는 순간에 남이와 서군이 나타나 막습니다. 이 부분이 참 묘합니다. 자인이 청군 왕자에게 순결을 빼앗긴다는 것이 한명의 조선 여자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전체가 민족적 수모를 당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죠.

민족이라는 말이 듣기 거북하면 공동체라는 말로도 쓸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 몽골군 정예부대를 뜻하는 니루가 나오는데 비혈연적이지만 가족보다 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남이와 자인 자매를 거두는 김무선 대감과 남이 아버지의 관계도 비혈연적이지만 가족과 같은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지요.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자인의 정체성은 더욱 사라지고 이 두 공동체 집단이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이 같은 민족성은 남이가 몽골군에게 쫓기는 위기 상황을 호랑이를 불러서 해결하는데 더욱 두드러집니다. 우리나라 호랑이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영물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이 영화가 나홍진 감독의 <황해>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외형적으로 쫓고 쫓기는 구조를 하고 있다는 점도 닮았지만 <황해>에서 구남이 연변에서 남한까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오는 이유는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최종병기 활>도 그런 면에서만 보면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요소가 많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만 이 영화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발견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 사후의 미묘한 시대 분위기가 이 영화에서 읽혀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텍스트적인 것이 아니라 컨텍스트적인 차원에서 분석해야할 문제이기에 감독의 의도와 무관한 무의식적 차원의 문제입니다.

예컨대 영화 도입부의 광해군과 인조에 대한 설명은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사후에 노무현 대통령을 광해군과 비교하는 내용의 글들이 무수히 많이 퍼져있습니다.

개혁을 추구하다가 반대 세력의 역풍을 맞았다는 점과 두 사람의 외교정책도 비슷했다는 지적들이지요.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시 기자 회견에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거론했던 적이 있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남이의 독백으로 나오는 말 “두려움은 직시하고,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노무현 대통령이 평소에 신조로 삼았던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결을 거슬러 헤엄친다”는 말을 닮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노무현 대통령 사후에 일었던 (그것이 대통령이든 민주주의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는 ‘지못미’ 정서가 영화에 과잉 투사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화에서 자인에 대한 두 사람의 맹목적 지키기로 나타난 것입니다.

영화 마지막에 못난 임금 인조가 다스리고 있는 조선 땅을 서군과 자인이 다시 찾아옵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직시하고 바람을 극복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대사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