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114타석 무삼진과 시즌 전 경기 무병살타, 606경기 연속 출장의 기록을 달성한 데드볼왕 김인식은 내 기억 속에도 남아 있다. 화려하고 뛰어난 타자라는 평가를 많이 받지 않았지만 성실히, 꾸준히 노력하는 그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대부분의 평범하고 성실한 소시민이라면 그의 모습 속에 자신을 투영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밋밋함이, 화려한 칭찬 없는 주의의 반응이 다소 씁쓸하게 느껴진다.

  박전섭, 김경훈, 임정면, 김종윤, 김우근

  타이거즈 골수 팬임을 자처하지만 원년 멤버였던 이 선수들의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언젠가 스포츠 2.0이라는 지금은 폐간된 잡지에서 예전 프로야구 선수들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여러 짧은 인터뷰 속에 한 무명 선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난 은퇴 이후로 한 번도 야구 경기를 보지 않았다고. 야구장 근처도 가지 않는다고. 누구에겐 즐거운 오락이지만 누구에는 처절한 상처가 되는 야구. 부디 이 선수들은 좋은 느낌으로 야구를 기억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투수 교체를 알리는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겹쳐 프랭크 시내트라의 목소리로 '마이웨이'가 구장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면,

  선수들이 등장하기 전에 나오는 음악 중에서 가장 그 선수와 잘 어울리는 음악은 박철순과 마이웨이, 호프먼과 지옥의 벨소리라고 생각한다. 박철순이 등장하고 내려갈 때는 일종의 종교의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불사조라는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 신의 아우라를 인간이 가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한 선수. 그래서 마치 프랭크 시내트라가 그를 위해 따로 이 곡을 만들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성공은 뭐고 비결은 또 뭐요. 그저 물속에 던져진 놈이 빠져 죽지 않으려고 허우적대다 보니 떠올랐을 뿐이지."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 선생의 말이다. 생각해 보면 김성한의 오리 궁둥이 타법, 박정태의 건들건들 타법, 양준혁의 만세 타법은 필살의 각오로 만들어진 멋진 예술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겉모습만 본 그 당시에는 웃기고 재밌어했지만.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진 인생의 완성품은 그 어떤 것도 가볍게 볼 수 없는 듯하다. 아니 오히려 신성한 느낌이다. 인생을 조금 아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까.

  선발과 마무리 양쪽에서 성실하게 쌓은 성적은 100승과 200세이브를 동시에 돌파하는 동양 초유의 진기록을 만들어 냈다.

  엘쥐의 김용수 투수의 이야기다. 서용빈, 이상훈, 유지훤, 김재현 등 많은 스타 선수들이 엘쥐에서 탄생했지만 가장 내 기억에 오래 남는 선수는 김용수다. 뭐라고 할까. 달 같은 느낌이었다. 절대 화려한 낮에 주인공이 될 수 없지만 어둡고 힘들 때 유일한 빛이 되는 선수라는 느낌이었다. 빠른 공, 엄청난 변화구를 가진 투수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적어도 그는 꾸준하고 그래서 완벽에 가까운 선수였다. 자신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극대화시키는 부분이 뛰어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화려한 태양같은 사람보다 이런 은은하고 꾸준한 달빛의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해야 하는데. 인생이든 야구든 그렇게 되기가 참 쉽지 않다.

  김홍집의 141구, 박충식의 181구

  두 투수 모두 포스트시즌에서 투혼의 투구를 뿌렸다. 하지만 결국 우승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우승 좌절이 결정난 후 그들의 슬픈 눈빛을 아직 기억한다. 이런 경기가 끝나고 나면 항상 나오는 말이 있다. 투수 혹사 이야기. 눈앞의 승리를 위해 선수의 미래를 망쳤다는 이야기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투구를 하는 투수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삶을 살면서 정말 화려하게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다 던져 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심, 만용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유혹을 뿌리치긴 힘들다. 혹사에 가까운 투구 후에 선수 생활을 망친 여러 선수들에게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어쩌면 화려하게 타오르는 한 순간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인생은 행운이 아닐지.

  우리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완투경기를 기록하며 팀의 빈틈을 가장 부지런히 메웠다.

  가장 많은 완투 경기를 기록한 선수는 바로 윤학길. 진정한 고무팔에 가까웠다. 내가 본 경기에서 그는 항상 변함 없이 던졌고(점수를 내줘도, 주지 않아도 별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냥 무조건 목적지를 가야 하는 기차 같은 느낌)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몇 시간을 마운드에서 버티고 있었다. 묵묵히 10년 이상 마운드에서 제 몫을 했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 기억에는 오히려, 포스트 시즌 패배의 원흉이라고, 조금만 삐긋하면 할 거를 안 한다고 질책을 받는 경우가 더 많았던 듯하다. 가까이 있어서, 늘 꾸준해서 소중함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선수였다는 생각에 안타깝다.


  비난은 잠깐이고 기록은 영원하다.

  빙그레 전 감독인 김영덕 감독의 지론이다. 이만수 타격왕을 위해 7연타석 고의사구를 지시, 다승왕을 위해 5회에 송진우 올리기 등은 유명한 사건이다. 작년 박용택의 사건도 이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구에서 기록은 정말 중요하다. 그런데 그 기록이 오래 남을수록 그 주홍글씨도 오래 남는다는 생각이 든다. 88올림픽 편파 판정과 복싱 금메달, 배리 본즈의 통산 홈런 기록과 약물, 표절과 YG, BBK와 M. 이런 것들은 따로 떼어져서 기억되지 않는다. 하나의 묶음이다. 그래서 검은 꼬리표 달린 1등보다 뒤가 깨끗한 2등이 난 편하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1998년, 현대 유니콘스는 인천 연고팀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라섰다. 그리고 89년 기적의 영건 3인방 중 유일하게 남아서 우승을 맛볼 수 있었던 '인천 소방서장' 정명원은 "박정현, 최창호와 함께 우승하지 못해 아쉽다"며 울먹었다.

  내가 가장 공포의 외인구단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팀은 김성근 감독이 지휘했던 태평양 돌핀즈와 쌍방울 레이더스다. 특히, 89년의 태평양 돌핀즈는 3명의 투수가 정말 멋있었다. '삼총사'와 가장 어울리는 활약을 보여준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이를 악물고 던졌다. 내 눈에는 그들이 오기로 뭉쳐 있다고 느꼈다.(그렇지 않고서야 무명에 가까운 선수들이 다들 10승 이상 씩을 갑자기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그런데 수많은 '외인구단'들의 공통점은 결코 '우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뿔뿔이 흩어져서 원래의 형체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기에 정명원의 저 인터뷰가 참 애잔하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다 같이 죽을 듯이 노력을 해도 달콤한 결실은 결코 모두에게, 아니 우리에게, 동지들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송유석에게 붙여진 '마당쇠'라는 별명은 정말 훌륭했다. 마당쇠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모든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거즈 팬이라고 자처하지만 이상하게 이 책에서는 다른 팀 선수들 이야기에 훨씬 더 관심이 갔다. 하지만 이 선수. 투창 선수를 하다가 고3때 야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배팅볼 투수 출신 송유석 이야기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의 땅달막하고 무식해 보이는 인상, 세련됨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거친, 못 배운 투구폼은 정말 기억에 강렬했다. 솔직히 타이거즈 팬이지만 외모적으로는 창피한 선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거침이 없었다. 어떤 순간에도 안 되는 능력을 최대한 끌어들여서 어거지로 막무가내로 덤비는 그런 느낌의 선수였다. 동네에서 온갖 굳은 일을 맡아 하는 약간은 덜 떨어진 힘만 센 바보 형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선수는 항상 기대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래서 충분히 만족하고 보는 것이 행복했다. 야구의 때(?)가 안 묻은 순수한 악동, 그래서 겉 모습과 달리 보호해 주고 싶은 선수였다. 그런데 그런 기억 속의 송유석이 건설사 사장이란다. 나에게는 식스 센스를 능가하는 반전이다.

  109번의 승리과 110번의 패전.

  개막전을 도맡아 출전했던 장호연을 기억한다. 그는 기분이 나쁜 선수였다. 항상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고 '열심히, 성실'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시즌 전 동게 훈련 불참으로 한 번씩은 기삿거리를 제공하는 선수였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되었다. 뭔가 보여주기 위해 남들 안 보는 데서 열심히 훈련했고 지는 경기도 역전한다는 생각으로 의지를 다지며 던졌다는 그. 그래서 그는 승리 못지 않은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편견과 오해 속에 잘못된 평가를 받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디 야구 선수뿐이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와 편견 속에 상처를 받는가. 보이지 않는 이면, 아니 볼 수 있는 이면을 굳이 보려고 애쓰지 않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너무나 냉철하고 가혹한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