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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을 보고 한참 뒤에 적내요. 조금 일찍 적었으면 더 상세하게 적을 수 있을텐데..
이미 제 기억이 많이 휘발되어버렸습니다.

스포는 만땅입니다. 아직 안보신 분들은 읽지 마시고 이 영화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지신 분들도 이 글을 안 읽어시는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별로였거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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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의 신작 <호우시절>은 원래 <청두, 사랑해>라는 영화의 한 에피소드였다고 합니다. <청두, 사랑해>는 프루트 챈, 추이젠, 그리고 허진호 감독이 2008년 5월 지진으로 파괴가 된 스촨성의 성도인 청두에 대한 이야기랍니다. 세 감독이 청두의 과거, 현재, 미래의 이야기를 다룰려고 했고 허진호 감독은 그 중 현재 편을 맡았는데 이야기가 커지면서 독립된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라네요. 그러니 이 영화는 청두라는 공간과 2008년 5월이라는 역사적 시간과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동하(정우성)는 건설 중장비 회사의 팀장입니다. 지진으로 파괴된 청두에 재건 사업 문제로 들렀다가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납니다. 그녀는 대학시절 그가 사랑했던 메이(고원원)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짐작한대로 선남선녀의 사랑이 펼쳐집니다. 화면은 장촛점 렌즈와 소프트 필트를 사용해서 최대한 뽀샤시하게 그려냅니다. 좀 사납게 말하면 노래방 화면 같고, 감독의 전작과 비교해 본다면 <봄날은 간다>에서 망원렌즈로 잡았던 그 이별 씬을 장시간 보는 것 같은 화면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선남선녀의 행복한 장면만 보여주면 두 시간 가까이 보여주면 밍숭맹숭할 겁니다.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에 갈등거리를 넣어줘야 드라마가 살 수 있습니다. 이때 느닷없이 청두라는 장소가 끼어듭니다. 청두는 두보 초당이 있는 시적이고 아름다운 공간이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지진 뒤에 아픔이 매몰되어 있는 곳입니다. 여자 주인공 이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녀의 이름은 지진이 일어난 5월입니다. 따뜻한 봄날 같은 그녀는 지진으로 남편과 사별한 여자입니다. 그녀는 그 때의 트라우마 때문에 대학시절 동하와 나누었던 기억들을 대부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남자의 이름을 생각해보십시오. 동하. 그는 겨울과 여름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메이가 유부녀였음을 알고 마음이 얼음처럼 차가워지지만 이내 따뜻한 여름이 되어 그녀를 감쌉니다. 그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중장비들이 매몰된 시체를 수습한다면, 그는 살아남은 메이를 아픔에서 구제해내는 거죠.

그런데 저는 남들이 다 좋게 보는 이 이야기들을 보면서 꺼림직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감독의 전작을 놓고 이 영화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외출>을 제외하고 허진호의 영화에서 남녀를 서로에게 아픔을 남기고 떠나갑니다.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다림이 정원의 죽음을 뒤늦게 알아채고 큰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그 슬픔을 극복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봄날은 간다>에서 이혼녀였던 은수를 사랑하다가 상처를 받은 상우의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행복>에서 은희가 죽은 뒤에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영수의 눈물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앞의 세 영화에서 해피엔딩이 가능하다면? 어떤 식으로 가능할까요? 그건 시간을 돌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원, 은수, 은희보다 더 큰 사랑이 과거에 있었음을 뒤늦게 발견해내는 방식입니다. 황당하다구요? <호우시절>에서 동하는 청두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차를 맞추기 위해 시간을 1시간 거꾸로 돌립니다. 그런데 그가 타고 있는 비행기는 마치 타임머신이 된 것처럼을 그를 과거로 돌려 놓습니다. 그 넓은 중국에서 동하는 메이를 청두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지사장(김상호)이 우연히 내뱉는 말들은 모두 예언이 되어 버립니다. 청두에서 유명한 ‘미인’, ‘팬더’, ‘술’, ‘음식’이라는 지사장의 말을 동하가 고스란히 다 겪게 되지요.

지사장이 술에 취해 술주정처럼 하는 말 중에 “큰 법칙 속에 작은 엇갈림이 있더라”는 말은 동하와 메이의 사랑 이야기에 주석을 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 법칙은 뭘까요? 바로 영화의 제목인 “호우시절”입니다. 두보의 시에서 따왔다는 이 제목은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라는 말입니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 서로 사랑을 했지만 “호우시절”이 아니어서 엇갈리고 맙니다. 그런데 청두에서 만났을 때 비가 내립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시 호감을 느끼고, 동하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하루 미루고 메이와 술자리를 하게 될 때, 지사장이 우연히 그 술자리에 끼어듭니다. 그때도 비가 내립니다. 메이가 술집 밖에 내리는 비를 보고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라고 하자 동하는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닌 것 같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영화는 그 비도 좋은 때를 알고 내리는 비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비로 인해 동하는 메이가 남편을 지진으로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동하는 메이의 아픔까지 감싸야 하는 남자입니다. 그러니 그 비는 필연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호우시절”이라는 제목은 이렇게 읽혀집니다. 두 사람의 만남을 위해서 메이의 남편은 필연적으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운명같은 사랑이 매져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에서 “좋은 때”는 메이의 남편이 죽은 때입니다. 그것은 청두에서 지진이 일어난 때입니다. 저는 남녀의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이웃 나라의 지진을 끌어들이는 방법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건 윤리적으로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지만, 저는 결코 해피한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비는 오지 말아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