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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같은 건 필요할 때만 하는 체질이라 가방에 뭔가를 넣으면 웬만해선 꺼내지 않습니다.

유난히 가방이 무거워질 때가 되면 그제서야 가방에 있던 것들을 모두 꺼내봅니다.

방청소를 하다가 냅다 가방도 비워야겠다 싶어 안을 비웠습니다.

오래된 메모들이 잔뜩 나왔습니다.

한장한장 넘겨보면서 쓰레기 통으로 갈 것들과 남길것들을 구분하는 일을 합니다.

버릴 것들은 그저 버릴 메모만이 아닙니다. 남길 것들은 그저 종이만은 아닙니다.

버려도 되는 것은 잊어도 된다는 말이고 남겨야 하는 것은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메모를 추리는 일이지만

알고보면 기억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기억들을 버리고 나면 가방 뿐만 아니라 머리속도 조금 가벼워진 듯합니다.

남은 것들은 더욱 선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강조도 된 듯하구요.

사실 제가 현실에서 하는 일도 이런 일입니다.

버려야 할 기억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일, 영원히 안고가야할 기억들은 찾아내서라도 남기는 일입니다.

먼지가 엉키고, 만지면 부서질 것만 같은 낡은 문서라고 모두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30년을 묵혀두었더라도 아니다 싶으면 영구 삭제 시키는 것이죠.

남는 것은 우리 사회의 기억입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후손들까지도 잊어선 안될 것이 있다면 소중하게 안고 갑니다.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하는 욕망.

제가 이 일을 선택하게 된 것에는 이런 욕망이 작용했나봅니다.

조금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 조금 더 오래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이겠군요.

문서 폐기를 승인하는 칸에 체크 표시를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자질구레한 돈거래도, 조그만 행사도, 일상적으로 진행된 일들도

별 것 아니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잊혀질 겁니다.

그 문서를 만들었던 사람도 곧 잊고 말겠죠.

가방을 비우고 메모를 정리하다, 새삼스럽게 의식하게 됐습니다.

우리 사회의 기억을 정리하고자 하는 사람.

하지만 메모를 버리는 나는

그 만큼 민첩하게

과거를 게워내지 못합니다.

shift+delete의 조합만큼 확실하게 삭제해야하는데

미련이 남습니다.

잊어버리면, 인생이라는 긴 필름 가운데 한 부분을 도려낸 것 같아질까봐 그러는 건지,

아니면 언젠가 다시 떠올려야할 시간이 올 것 같아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루종일 세상의 기억을 정리하는 일을 하지만

정작 제 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네요.

언제나 복구가 가능한 휴지통 파일처럼 쌓아두고 맙니다.

그냥 내일 처리하지 뭐, 하면서.

어쩌면 자고일어나자마자 휴지통에서 꺼내 영구 백업할지도.....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