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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힐코트 감독, <더 로드>(The Road, 2008)



* 스포일러 있습니다.

원작이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면, 그 영화에 대한 평가는 한결 같습니다. "원작보다 못하다", "원작의 맛을 살리면서 제대로 각색했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를 영화화한 존 힐코트의 영화도 이런식의 평가가 대부분입니다.

저는 이런 평가는 무의미한 것으로 봅니다. 코맥 매카시는 영미 문학계의 현존 최고 수준에 있는 소설가입니다.(존 업다이크가 작년 이 맘때쯤 사망하고 난 뒤, 그와 더불어 논의 될 수 있는 인물로는 필립 로스, 토니 모리슨, 조이스 캐롤오츠, 폴 오스터 정도 아닐까요?)

그런 인물의 원작을 영화로 아무리 잘만들어도 좋은 소리 듣기 힘들죠. 그건 하나마나한 소리입니다. 저는 아직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엔 영화제의 동명 영화를 보기 전에 미리 봤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원작을 읽기 전에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는 활자 매체가 아닌 이미지 자체에서 압도하는 영화적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존 힐코트의 영화 <더 로드>가 보여주는 가장 큰 매력은 핵전쟁 이후 미국의 풍광입니다. 폭격을 맞은 것처럼 무너져내린 건물들과 두동강나기 직전의 고가도로, 불에 그을린 숲과 같은 회색의 풍경은 이 영화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촬영을 담당한 스페인 출신의 촬영감독 하비에르 아귀레사로베는 <디 아더스>, <씨 인사이드> 그리고 최근에 <고야의 유령>과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를 촬영한 감독입니다. 존 힐코트와 하비에르 아귀레사로베는 CG 매트프린팅을 최대한 억제했습니다. 영화에 보이는 붕괴된 건물들은 카트리나로 폐허가 된 뉴올리안즈에서 실제 촬영된 것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도록 태양 광선이 적은 날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멋진 장면들이 스크린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죠.(이 영화는 다운로드로 보지 마시길 바랍니다. 알아두실 것은 화면 사이즈가 2.35:1입니다. 제가 본 영화관은 사이즈가 작은 곳이어서 화면이 잘려 나오더군요. 스크린이 큰 영화관에서 보면 좋은데 <아바타>가 선점을 해버리는 바람에 지금 이 사이즈로 볼 수 있는 영화관이 있나 모르겠네요)

영화의 내용은 어떻게보면 진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아버지와 아들이 따뜻한 남쪽으로 길을 가며 겪는 에피소드들입니다. 거기에 무서운 식인종들이 출현하지요. 그러니까 <챔프> + <미드나이트 카우보이> + <나는 전설이다>의 혼합 버전처럼 보입니다. 원작은 여기다가 진지한 윤리적 문제를 제시하나본데, 영화로는 표현하기 어려우니깐 마지막엔 헐리우드 가족주의로 성급하게 매듭을 짓는 면이 없지 않지만 재밌게 봤습니다. 무엇보다 출연배우들의 연기가 압도적이었지요. 비고 모르테슨의 연기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감이고 아들 역의 코디 스밋-맥피의 연기도 좋습니다. 거기다 로버트 듀발과 샤를리즈 테론의 조연도 돋보이고요. 연기면에서는 흠잡을 때가 없는 영화입니다. 
 

물론 이 영화에도 911테러이후 나타나는 징후적 현상들이 보입니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서 이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와 더불어 '911이후의 헐리우드 영화에서 가족주의'라는 주제로 거론될만한 영화입니다(이런 분석을 제일 잘하시는 분이 영화학자 로빈우드 선생님인데 작년에 돌아가셨네요 TT)

<미스트>와만 비교해본다면, 이 영화는 <미스트>처럼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미스트>처럼 '자살'을 선택하지 않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희망을 보여줍니다. 춥고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라도 '가슴 속에 작은 불씨'하나를 간직한채 살아야한다는 주제를 너무나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이 주제는 같은 작가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마지막에서도 나옵니다).

이 영화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지나칠 정도로 가부장적인 윤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샤롤리즈 테론이 맡은 엄마는 아들을 임신한 순간부터 아이를 죽이려 합니다. 이 힘든 세상에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논리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족을 해체하려 합니다. 이에 반해 비고 모르테슨이 맡은 아버지는 아들을 '신이 내려준 선물'로 생각하며 아들을 어떠한 순간에도 지켜 나갑니다. 이 아버지는 근래 헐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진한 부성애를 보여줍니다(비고가 소리내어 우는 장면이 몇번이나 나오는데 성인남자가 헐리우드 영화에서 소리 내어 우는 장면을 보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아 흥미롭더군요.) 그러면서 가족을 버린 그녀를 잊지 못하지요.

영화 종반에 식인종 무리에 붙잡히는 모녀 일행이 살짝 보이는데, 이 장면은 영화 초반에 엄마가 가족을 버리지 않고 지켰더라도 살해되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만큼 가부장적 마초근성이 보여지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지나치게 종교적 인과응보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존자에게 도움 주기를 꺼려하며 흑인 도둑에게 총으로 위협을 했던 아버지는 (또 다른) 흑인이 쏜 화살에 맞습니다. 음식을 남겨준 이름모를 집주인에게 감사기도까지 하고, 사람들에게 베풂을 선택한 아들은 라스트 씬에서 자신의 도움으로 굶주림을 피할 수 있었던 가족들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지요.

너무나 상투적인 것 같은 결말이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911의 상흔이 헐리우드 영화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보기에 아주 적합한 텍스트입니다.
<아바타>만 보시지 말고 이 영화도 한번 봐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