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서울시내 집값이 아흔번 쯤 흔들어 딴 병맥주 거품 마냥 부풀어 오르던 시절,
여자친구는 오랫동안 계획해 왔다는 장밋빛 미래를 내게 말했다.
간단한 골자였다. 빨리 밑천을 마련해 부동산에 투자해서 떼돈을 모은 다음,
은행이자로 평생 세계 여행이나 다니자는 것.

그 아이의 눈망울은 꿈과 희망으로 초롱초롱 빛났고 나는 벙쪘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두 시간 정도 논쟁을 빙자한 싸움을 벌였다.

그건 투자가 아닌 투기라고.
현실이 그렇다 어떻다 하지만 어쨌거나 돈이 돈을 번다는 말,
대학 갓 졸업한 스물여섯살짜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고.
그 동안 배워 익힌 능력을 바탕으로 땀 흘려 일할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니 젊음을 고작 부동산 투기에 팔아 치울거냐고.

투자란 자고로 전도 유망한 사업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
자본을 대고 합당한 배당을 받는게 순리이다.
그런데 투기라니. 고작 시세차익이나 노리는 기회주의자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여자친구인데.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원리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근본은 차이가 없다.
불확실한 정보를 바탕으로 불로소득을 벌이는 발칙한 일은
당장은 달콤하게 다가 올 수 있지만 언젠가는 크게 한 방 당하게 된다.
게다가 국민 모두가 밥은 안 짓고 투기나 한다면 그 결말이 어떻게 될까.
국가 산업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가 돈 놓고 돈 먹기에나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확고한 주관이었다.

얼마 안 있어 그 아이의 연락처는 내 휴대폰에서 삭제되었다.
부동산 투기 이야기가 컸다. 건설적이지 못해 실망했다.
앞으로는 틈틈이 땅 알아보러 다니겠다던 그 아이의 돈질이
뉴타운 바람에 대박을 쳤는지 쪽박을 쳤는지는 알 수 없다.

운 좋게 그 아이가 땅 갖고 장난쳐서 손에 돈 좀 쥐었다 하더라도
당시의 내가 틀렸다는 생각은 바퀴벌레 눈물만치도 없다.
다시 만나게 된다해도 이 주제를 다시 꺼내 설복 시킬 에너지도 없다.
그냥 영화 <작전>이나 한 번 보고 오라는 말만 하고 말란다.



응? 영화가 주식이야기지 부동산은 아니지 않냐고?  아까도 말 했다.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시장에서 주제 파악도 못한 채
정보도 없이 일확천금을 꿈꾸는 개미들이 버글버글 하다는 점.
그들의 방식이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는 점.
그런 순진한 개미들을 잡아먹는 개미귀신들이 날고 긴다는 점.
근본은 차이가 없으시다.

나는 시사회 내도록 몇가지 다른 한국 영화들을 떠올렸다.
먼저 범죄단 내부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전.
<범죄의 재구성>을 따라가려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식이라는 어려운 주제에 대한 설명이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 했고,
반전이 화끈하지도 않았다.

재야의 별 볼일 없는 개미가 큰 손 들을 쥐락펴락 한다는 로망.
이는 <타짜>를 벤치마킹 한 것처럼도 보이나
주인공이 큰 손들에게 붙잡힌 우연한 모양새는 설득력이 없다. 개연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이왕지사 욕설과 협잡으로 19금 등급 받을거였으면
애초부터 김민정의 열연을 좀 더 주문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타짜>의 '정마담' 김혜수의 농익은 연기야 말로 시대의 대배우의 역할이 아니던가.
아, 내가 보고 싶어라 하는 것은 꼬꼬마 시절부터 좋아 하던 민지의 속살이 아니라
그의 혼을 다 바친 연기이다. 오해 없길 바란다.

이런 저런 복선들의 배치가 맛깔스럽기는 하나
그렇게 짜낸 이야기가 기껏 조직원들 끼리 배신에 또 배신.
주인공의 기사회생 같은 엉성하고 억지스러운 필연성이라니 빛이 바란다.

조폭과 살인이 없으면 이야기가 굴러가지 않던 한국 영화 바닥에서 주식이라니
퍽이나 신선한 소재겠구나 했건만 조폭은 어김없이 나온다. 살인도 나온다.
정녕 한국영화는 조폭코미디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나름 괜찮은 오락영화다.
두 시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90분 정도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긴장이 팽팽하다.
똑부러지면서도 청초하고, 그러면서 관능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김민정에게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2% 아쉬운 것은 아까 말한 '김혜수급' 열연 뿐.
박용하, 박희순, 김무열이라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세 남자들도
각자의 캐릭터에 충실하다.

주식이라는게 원래 모르는 사람은 듣기만 해도 골치 아픈 소재이긴 하나
영화는 하나도 어렵지 않다.
섯다를 몰라도 <타짜>를 봤듯 주식을 몰라도
시종일관 흐르는  긴장감을 즐기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다만 혹여나 이 블로그를 보시는 '개인투자자' 다른 말로 '백수'가 있으시다면
컴퓨터 잠깐만 끄고 동네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만 감상 하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적절하게 등장하는 큰손들의 수법이
철 없는 개미들의 가슴을 한 없이 할퀴어 줄터이니 이 어찌 마음에 들지 아니할 소냐.

굳이 워렌버핏까지 끌고 올 것도 없다.
짧은 시세 차익에 일희일비 할게 아니라
내재적인 가치를 보고 투자하라는 메시지 역시 진부하고 꼬장꼬장하지만 가치 있다.
하루 동안 수천씩 오르락 내리락 하는 주가는 기업의 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욕심일 뿐이라는데도 동의한다.



경제가 개판이다. 외환위기 때 보다 어려워질거라느니,
심지어는 대공항 만큼 힘들어질거라느니 하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지금 주식 산다고 1년 내에 부자가 될지 안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지금을 위한 투기가 아닌 미래를 위한 투자를 했으면 좋겠다.
지금 안 팔아서 손해 나면 어떡하냐고? 극 중에서 강현수가 그러더라.
그래봐야 돈 아닌가.

10점만점에 8점 준다.
딱히 볼만한 영화도 없는 요즘 <작전>을 선택해서 돈과 시간이 아깝지는 않겠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이 주가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다고 생각하시는 개미라면
반드시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