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우리는 'PD 수첩'에 빚지고 있다 - 최재천
- 작성일
- 09-04-09 00:05
관용, 참 중요한 것 같아요.
http://blog.ohmynews.com/cjc4u/
황우석 사태 취재기를 총정리한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라는 책이 있다. MBC
<PD수첩> 한학수 PD가 2006년 11월 출간했다. 내내 미루다 지금이야말로 이 책을 읽어야 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책의 후반부를 요약한 것이다.
2005년 10월 23일 황우석 교수는 MBC 보도본부장을 찾아왔다. 보도본부장이 서울대
수의대 3년 후배라는 점을 이용해 대놓고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내일 청와대에서 점심 약속이 있어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가
있는데, <PD수첩>이 자신을 취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 황 교수측의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그들은 ‘과학’으로 답변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하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276면).
10월 28일 저녁 9시경에 전화가 왔다. 황우석 교수라고 했다. 처음 받는 전화였다. 황 교수는 우리를 빈정거렸다.
“한학수, 김보슬PD가 동분서주하더구만요.”
황교수가 던진 말이었다. 우리가 걸어 온 행적을 죄다 알고 있다는 말이자, 너희들이 아무리 뛰어도 내 손안에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286면).
▲ 황우석 교수 난자줄기세포 관련한 PD수첩 방송 (2005년 12월 5일분)
11월 17일 처음으로 인터뷰가 있었다.
황교수는 “유전자 지문 결과를 잘못 해석하면 나중에 우리도 모르는 사람들과 일반 시청자들한테 MBC가 창피를 당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MBC가 큰 일 납니다(374면).”
11월 27일은 일요일 이었다. 이 날 집에서 <중앙일보>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기고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노대통령은 청와대 홈페이지에 <줄기세포 언론보도에 대한 여론을 보며>라는 글을 올렸다.
“황우석 교수 줄기세포에 관하여 MBC <PD수첩>에서 취재를 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처음 취재방향은 연구 자체가 허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로 황 교수가 매우 힘들어 한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수십명의 교수, 박사들이 황 교수와 짜고 사기극을 벌이고 있고, 세계가 그 사기극에 놀아나고 있었다는 말인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나서서 뭐라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지만 경과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 나도 MBC의 이 기사가 짜증스럽다. 그리고 취재의 계기나 방법에 관하여도 이런저런 의심을 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연구과정의 윤리에 관하여 경각심을 환기시키는 방법이 꼭 이렇게 가혹해야 할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403면).”
12월 3일 밤 최승호 팀장은 참여정부의 전직 장관 모씨를 만났다. 물론 모씨는 공식적으로는 ‘자신이 청와대 대리인의
자격은 아니라’고 운을 떼었다. 모 씨는 <PD 수첩>이 왜 줄기세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지에 대해 캐묻고 난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설사 줄기세포가 없다고 해도 방송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모 씨는 그 이유로 국민들이 겪을
혼란을 들었다. …
YTN 사태가 나기 전날 밤에, 우리가 받은 최후통첩이었던 것이다.
나는 모씨의 인품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발언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 진보입네 개혁입네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박정희 패러다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을 때, 그가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423면).
12월 4일 날이 밝았다. … 씩씩한 조연출 김보슬도 함께 밤을 새며 편집을 도왔다. 아침 7시부터 KBS2 <일요
뉴스타임>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황당한 주장이 나오고 있었다. ‘세상보기’라는 꼭지에서는 “줄기세포 100% 진짜다”라는
내용이 보도되고 있었고, 이를 보도하던 홍00 기자는 <PD수첩>의 검증에 대해서 ‘아마추어가 세계적인 과학자를
검증하는 것이 참으로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말했다(425면).
회의가 이어졌고, 당일 <뉴스데스크>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는 방안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또한 <PD수첩>의
취재 내용에 대한 방송 여부가 논의되었는데, 대세는 방송이 힘들다는 것이었다(427면). MBC는 <뉴스데스크>에서
대국민 사과를 하며 ‘항복 선언’을 했고, <PD수첩>은 초토화되었다(429면).
팀장은 다음 날에도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이런 의견을 말했는데, 이때는 아주 간명하게 표현했다. “학수야, 네가 구속돼라.(432면)”
같은 날 한편 노 대통령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황 교수팀의 연구 성과에 대한 검증 문제는 이 정도에서 정리되기를
바란다”고 언급했다. 또, “이 문제는 이후 황 교수의 연구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증명될 것”이라고 덧붙이며, 심판관처럼 마무리
역할을 했다(440면).
오랜만에 <조선일보> 김대중 씨의 글이 눈길을 끌었다. 황 교수를 비판하는 세력들이 하는 짓이 마치 ‘좌파들의 마녀사냥’과
같다고 몰아세웠다. 이 날 <조선일보>는 ‘황 교수 관련 <PD수첩> 제작진’이라는 기사에서 내가 서울대
총학생회에서 활동했던 사실을 문제 삼았다. 나를 민주노동당과 연계시키고, 노조위원장 출신인 최승호 팀장과 MBC 최문순 사장을
‘코드’가 맞는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논란의 본질과는 아무 관계없는 전력을 문제 삼아 ‘황 교수 비판의 배후에는 좌파 운동권이
있다’는 <조선일보>김대중 씨의 논리를 뒷받침한 것이었다(441면).
12월 7일 황 교수는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살은 빠지지 않았으나, 얼굴에는 텁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나타났다.
12월 8일 오후 오명 과학부총리가 황 교수의 입원실을 방문했다. 오명 부총리는 이 자리에서 ‘도대체 언론이 어떻게 과학을 검증하느냐’며 일갈했다. “세계적인 대학자가 쓴 논문이고 검증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했고, <사이언스>에 논문이 실렸습니다. 제3자가 검증에 낀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었다. 손학규 경기도 지사는 “황 교수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아예 격리시켜야”한다며 한 걸음 더 나갔다. 그 뒤에도 정동영 씨가 병원을 방문해 황 교수를 치켜세웠다(457면).
12월 15일 우리가 프로그램을 마무리하고 있는 그때에 9시 <뉴스데스크>가 방송 되었다. 엄기영 앵커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식을 전했다.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가 없다고 합니다.”
말을 하는 앵커도 떨렸고, 이 소식을 듣는 국민들의 마음도 떨렸을 것이다(480면).
마지막 챕터 제13장은 ‘벌거벗은 대한민국, 희망은 있는가’라는 결론 부분이다. 사실관계보다는 한 PD의 개인적 주관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다시 한 PD의 말이다.
“나는 황우석씨의 논문에 대한 최초 제보를 접하고 나서 두려웠다. 그러나 이 사안을 온갖
두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밀어붙여 보았다. 갈 데까지 가 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비열한 언론인, 술수에 능한 과학자, 가면을
쓴 정치인, 충격에 빠진 대중’ 들을 만났다(501면).”
저자는 백년 전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의 산 증인인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글로 마무리한다.
“저는 최후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확신으로 거듭
말씀드립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에서야 ‘사건’이 진정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오늘에서야 각자의 입장이 확실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마지막 두 문장으로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한다. “그렇다. 진정으로 한국에서도 ‘사건’이 시작되었다. 황우석 파문은 이제 긴 터널의 끝이 아니라, 거대한 화산의 분화구가 되어야 한다.”
▲ 한승수 국무총리
2009년 4월 6일 한승수 국무총리는 국회대정부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검찰의 MBC <PD수첩> 수사와 관련, “전 세계에 MBC 같이 사실을 오도하는 TV가 흔치 않다”고 했다. 다음날인 7일 역시 한 총리는 대정부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PD수첩에서 사실과 다른 보도를 함으로 전국민이 굉장이 고통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고 했다. 물론 광우병 보도와 관련된 <PD 수첩>을 지칭한 것이다.
지난 17대 국회시절 필자도 <PD 수첩>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적이 있다. 법무법인의 대표를 맡고 있다 국회로 갔는데, 법무법인에서 버릇대로 모든 소송 서류에 여전히 필자의 이름을 대표변호사로 적어 놓은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 국회의원이 돼서도 수많은 사건을 수임하고 변론을 계속하고 있는 변호사가 돼 있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국회법은 겸직을 허용했고, 다른 개인변호사와는 달리 필자는 그저 대표변호사로 법무법인의 소유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반론의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회고하자면 이른바 진보적 언론축에 드는 <한겨레21>이 정리해서 처음으로 보도했고, <오마이뉴스>는 이를 그대로 전제했고, 나중엔 <PD 수첩>이 이를 다시 심층보도하는 순이었다. 어느날 아침 술이 덜깬 상태에서 <PD 수첩>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동안 변명했고, 의정활동이 주는 재정적 압박에 대해 나름대로 설명에 설명을 거듭했다. 며칠 뒤 <PD 수첩>에 필자의 목소리가 방송됐다.
아마 이랬던 것으로 기억된다. 거의 10여분 가량 계속된 전화통화 내용 중 “국회의원도 먹고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라며 답답한 마음에 언성을 높였던 부분만 방송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음날 여기저기서 실컷 욕 좀 얻어먹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워낙 아픈 기억이라 지금의 재생이 도리어 정확치 않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충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변호사를 휴직해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쪽 질문에 대한 답변의 일부였던 것으로 대충 기억된다. 물론 그 말도 맞았다. 다만 휴직하면 10여명의 변호사와 40여명의 직원이 떠나야만 했다. 그래서 결국 필자는, 방송의 맥락을 거두절미 하자면, 공익보다는 나 먹고 살기 바쁜 ‘국회의원의 외투를 입은 변호사‘가 되고 말았다. 한동안 아팠다. 하지만 이내 받아들였다. 언론과 공익에 수인할 의무를 생각해냈다. 그리고 억울하지만 일정 부분 사실은 사실이었던 셈이다.
얼마전 대학 헌법 강의를 준비하던 중 미국 헌법책의 표현의 자유 부분을 새롭게 읽게 되었다. 표현의 자유의 핵심은 나에게 있어서는 자기결정이자 자기확신이요,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관용 그 자체라는 설명이 있었다. 미국 헌법의 해석 앞에 새삼 고개숙였다. 우리는 그저 헌법책에서 민주주의 기초이자 주권자의 공적 결정으로서의 의미만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헌법을 전공했던 법률가로서 외눈박이의 색맹이 걷히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관용이다. 표현의 자유야말로 나라의 기초를 이루는 주권자로서의 의사결정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존엄에 기초한 합리적 개인으로서의 자기결정이요 자기확신이다. 그래서 내가 존중받고 싶거든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하고, 나도 용서받고 싶거든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표현의 자유가 던져주는 헌법정신이다.
우리정부는 하루빨리 촛불문화제의 강박과 외상성증후군을 극복해야한다. 잃어버린 1년 이라는 자기최면에서 여러 강박이 생겨난다. 시간을 벌충하려 하는 나머지 속도전을 내게 하고, 의도하지 않게 표현의 자유에 대한 불안이 조성되며, 법질서 과잉에 젖어 든다. 그렇게 되면 표현의 자유의 본래적 의미가 되살아난다.
물론 <PD 수첩> 제작진은 결코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강조를 위한 일부의 과장이나 의도하지 않은 일부의 오역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의 진실을 흐려놓진 못한다. 그래서 필자는 <PD 수첩>의 진실을 믿는다.
불과 3년이 조금 지난 2005년 겨울, <PD 수첩>은 우리에게 진실의 힘을 보여주었다. 우리사회는 그 진실 덕분에 힘차게 한걸음을 더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너, 우리는 <PD 수첩>에 빚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손을 들어 <PD 수첩>의 채무자라고 자백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