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BALLPARK

몇일 전 자주 가는 중고책 사이트에서 제가 좋아하는 책들이 아주 좋은 가격에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평소에 구입할려고 했는데 그 가격에 눌려 선듯 구입하지 못한 책들이었지요.

지젝과 라캉, 주디스 버틀러, 가라타니 고진의 책들로 대략 12권 가량을 주워 담았는데 얼마 뒤 내 핸드폰으로 문자가 하나 왔습니다.

제 주소를 보니 택배로 보내는 것보다 직접 와서 가져가는 것이 서로 좋을 듯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만나는 장소와 시간을 정해놓고 책을 받으러 갔습니다.

예상보다 빨리 그 분이 나왔는데 샤프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였습니다.

옆에는 중학생으로 보이는 딸이 있었지요.

그 분은 책을 주섬주섬 내놓고 저는 현금을 지갑에서 빼서 드렸습니다.

"책을 한번 확인하십시오....   제가 모으기만 했지 실제로는 보지 못했기에 새 책이랑 마찬가지입니다..."

느릿느릿하게 말은 건네는 그 목소리에는 왠지 아쉬움이 묻어 있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압니다.

처음 책을 살 때의 그 기분을...

세상의 모든 비밀이 담겨 있는 그 책이랑 연애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그가 모은 책들이 이제 주인을 떠나 제게로 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책을 받아 드는데 그 분이 조금 더 들고 있다가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목례를 하고 그 분과 저는 제 갈길을 갔습니다.


차를 몰고 돌아오는데 큰 길에서 그 분이랑 딸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머리를 푹 숙이고 걸어가시더군요.

아마 이런 책들을 모은 것으로 보아 공부에 많은 미련이 있었던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다 급하게 돈이 필요해서 책을 내놓게 되었나 보더군요.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그 남자분이랑 묵묵히 뒤를 따라 걷던 그 딸아이가 제 눈에 지금까지 밟히네요..